군인·정치가. 제5·6·7·8·9대 대통령. 경상북도 구미 출생.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까지 문경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2~1944년 만주 신경(新京:지금의 長春)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 뒤 관동군에서 근무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군에 들어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9년 여수·순천반란사건과 관련되어 공산주의 혐의로 군법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군선배·동료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예편되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소령으로 군에 복귀하여 육군 정보국 작전정보과장, 제9사단 참모장 등을 거쳐 1953년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미국 육군포병학교에 유학하였으며, 1956년 제5사단장, 1958년 제7사단장을 거쳐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59년 서울군관구사령관,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하였다.
2군부사령관으로 있던 1961년 김종필(金鍾泌)을 비롯한 육사 8기 장교를 중심으로 5·16군사혁명을 일으켰다.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의장에 취임한 박정희는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하여 정치·사회개혁, 경제개발계획 관철 등 조국 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1963년에는 대장으로 예편하고 민정에 참여하여 민주공화당 총재로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윤보선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일본의 경제원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미국과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1965년에는 6·3사태 등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켜 대일청구권자금을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쟁에 국군을 파병하였다. 또한 1962년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일본 자금과 차관 등을 들여와 산업기지 건설, 수출드라이브정책 등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국민의 절대빈곤을 해소하였고,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를 없애기 위한 <새마을운동>을 펼치는 등 과감한 경제성장정책을 실시하였다.
1967년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훗날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등의 결사적 반대에도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고 포항제철·서울지하철 등을 건설, 한국경제를 고도성장 궤도에 올려놓음으로써 한국은 개발도상국 가운데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한 공업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3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는 김대중(金大中)과 맞서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고, 1972년 7월 남북대화를 추진하여 <남북공동성명>을 이루어냈다.
1974년 8월 15일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으로 부인 육영수(陸英修)를 잃었고, 1977년 박동선(朴東宣)의 코리아게이트사건 등 국제적 스캔들에 휘말렸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주국방을 위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의 군인적인 우국충정, 상의하달식(上意下達式) 강권지배와 국가재건국민운동·새마을운동 등은 경제성장에 큰 힘을 발휘했다.
1979년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비판한 김영삼(金泳三) 신민당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자, 김영삼의 지지기반이던 부산·마산지역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부마항쟁 처리를 놓고 벌어진 강경파 차지철(車智澈)과 온건파 김재규(金載圭)의 갈등 끝에 그는 오랜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생애를 마감했다.
박정희는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 정경유착과 일그러진 군사문화 유산을 남기는 등 한국 사회·경제구조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으나, 한국근대화와 경제적 성장을 위한 일념으로 고뇌한 대통령,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포항제철을 세우는 등 조국발전의 탄탄대로를 닦아 오늘의 세계 속 경제강국 한국이 있게 한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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