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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상실,

조혜인 |2006.09.28 22:15
조회 36 |추천 0
 
상실 The Year of Magical Thinking 조앤 디디온 저/이은선 역 | 시공사 | 2006년 06월  

 

태평하고 느긋한 오후, 따뜻한 햇살이 더 없이 좋았던 기분 좋은 날,도서관에 꽂혀있는 수천권의 책들 사이에서 내 손에 잡힌 것은 '상실'이라는 책이었다.

 

검은 바탕에 '상실'이라는 글씨가 은빛으로 은은하게 혹은 오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미국 작가의 책이 왜 손에 잡혔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요근래 내 마음속에서 물결치던 '상실감'이 책 제목과 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빠르게 변한다.

인생은 한순간에 달라진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기도 한다.

자기연민의 문제.

 

책은 이렇게 4줄의 짧은 메세지로 시작된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났다 ' 는 한 줄의 글은 저녁식사를 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남편, 존 그레고리 던을 심장마비로 잃어버리게 된 디디온의 2oo3년 12월 30일을 단적으로 묘사해낸 것이었다.

 

그녀는 40여년을 함께 살아 숨쉬던 남편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그 날부터 책이 쓰여지기까지의 1년여간의 시간동안 자신이 겪어온 심경의 변화를 정말이지 '작가다운' 필체로 절절하게 혹은 담담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특히, '저녁식탁' 이라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상황이 그 죽음의 충격을 더 강하게 인식하도록 만들고 있는데, 그녀는 존의 죽음을 오히려 초반에는 '침착하게' 받아들이는듯 보인다.

 

하지만, 결국 존의 물건을 정리하며, '존이 돌아올지 모르니 그의 신발을 버릴수가 없었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의 죽음을 실제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부정하려고 하는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곧 비통으로, 더 나아가서는 자기연민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특히 '비통함'이란 감정상태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에 대해 상상했을 때의 '비통함' 이란 것과 실제 상황에서 느끼는 그것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비통함이란 감정은 절대 겪어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슬픔 그 이상의 슬픔임을 강조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미성숙한 존재가 된다. 냉정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고집도 있고, 무던히 이성적이던 그녀 역시도 존의 죽음 앞에서 이성의 개념을 상실한다. 어딜가나 떠오르는 존과의 추억에, 그리고 추억을 떠올릴수록 더욱 커져가는 존의 부재감에 그녀는 점점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까지 자신을 몰아간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더 절망하도록 만드는 것은 생과 사를 오가는 하나뿐인 그녀의 딸 퀸태나였다. 존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채 머리속에 자리하기도 전에, 그녀는 딸 퀸태나 역시 잃게될까봐 더 마음 졸이며 집착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가며, 그녀는 점차 존이 없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게 되고, 그의 죽음 역시 조금씩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상에서, 그 중심에서 멀어지는 '존'의 자리에 대해서도, 존에 대한 '선명한 배신'으로 느껴진다는 책의 마지막 표현에서 그녀는 아직도 존의 부재를 느끼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평생 비어있는 공허한 빈자리가 될 것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나 역시도 종종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상상하곤 하는데, 그 상상의 범위는 부모님과 언니나 동생, 가까운 친구, 심지어는 내 자신의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내 자신의 죽음보다 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은, 남겨진 자로서의 내 모습이었다.  

 

아마 내가 햇살 좋은 날, 수천권의 책 사이에서 기분좋게 이 책을 집어들던 순간처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그렇게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찾아와 아마 책에서 묘사된 '비통함' 과 '상실감'을 홀연히 남겨놓고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의 죽음 그 이후의 그녀 기억의 단편을 따라가며 느낀 그 애절한 감정과 슬픔을 떠올리며, 지금 살아 숨쉬는 현재에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본다.

 

'상실' 그 공허하고 쓸쓸한 두 글자를 기억하며,

 

 

***

섬세하고, 구체적이며, 절제된 감정표현이 맘에 드는 책ㅡ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들에 관해서는 조금 지루할 수 있음ㅡ

 

 

상실 ( The Year of Magical Thinking) / 죠앤 디디온

 

추천의 글


저녁 식탁에서 미망인이 되다
비통의 시간
낯선 두려움
마법을 꿈꾸다
추억과 탄식의 하룻밤
자기연민의 문제
하루치의 위로
두 번째 상실
새로운 현실
기억의 소용돌이
그대로 두기
애도의 시간
마지막 선물
불운과 불안
또 하나의 소용돌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
상실, 아무도 모르는 곳
잔인한 집착
다시, 또다시
어떤 전조
거꾸로 흐르는 시간
마법을 꿈꾸던 한 해

역자 후기

 

 

13

갑작스럽게 재난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이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기 조금 전까지 모든 것이 얼마나 평범했는지에 모든 초점을 맞추게 된다.

 

16

나는 지금 죽엄, 질병, 운과 확률, 행운과 불운, 결혼과 아이와 추억, 슬픔, 인생이 끝났을 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거나 부인하는 방식, 온전한 정신의 피상적인 측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제멋대로 춤을 추던 그때 이후 몇 주 그리고 몇 달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주이다.

 

16

글이 곧 나의 현재이고 과거지만, 지금은 단어와 운율 대신 디지털 편집기가 갖춰진 편집실이 있어 그  편집기의 자판 하나만 누르면 전후 순서 없이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펼쳐졌으면 좋겠다. 수많은 장면과 미세하게 다른 표현과 여러 가지 해석 중에서 독자가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7

지금은 단어만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순간이다. 지금은 나만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순간이다.

 

22

나는 부엌 전화기 옆에 뉴욕 프레즈비티리언 병원의 구급차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붙여놓았었다. 물론 이런 순간이 올 줄 알고 붙여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 아파트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구급차를 불러야 할 때를 대비해 붙여놓은 것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25

그분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으면 아무 말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분은 계속 '아주머니, 좀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저는 계속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라고 했죠.

 

25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것은 사태를 해결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28

우리는 둘 다 작가이고 집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날마다 서로의 목소리로 하루를 채웠다.

 

35

무언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메모를 하는 능력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난다고 경고했던 사람이.

 

38

필립 아리에서그 <죽음의 역사>에서 말하길, '롤랑의 노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돌연사나 사고사의 경우에도 '사전에 경고를 하는 것'이 죽음의 기본적인 특징이라고 했다

 

38

'비통한 심정' 이라는 것은 막상 겪으면 예상과 전혀 다르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비통하지 않았다. -중간생략- 나는 두 번 다 슬프고 외로웠으며 (버림받은 아이는 나이에 관계없이 외로움을 느낀다) 두 분이 겪은 고통과 무기력감과 육체적인 수모를 함께하지 못하고 심지어 진심으로 인정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하지 못한 말 때문에 지나간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39

부모님의 죽음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마음속 깊숙한 곳을 자극해, 예상치 못했던 반응과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우리는 '애도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그 막연한 기간동안 잠수함을 타고 해저로 내려가 때로는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먼 곳에서 우리를 강타하는 추억의 폭뢰를 맞으며 조용히 있는 것인지도 몰라.

 

40

'비통'은 달랐다. 비통에는 거리가 없었다. 비통은 파도처럼 , 발작처럼 찾아왔고 갑작스런 불안 때문에 무릎이 떨리고 앞이 안 보이고 일상이 지워졌다. 비통을 겪어본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파도'현상을 경험한다.

 

45

첫날 밤 이후에는 몇 주 동안 여러 사람이 내 곁을 지켰지만 첫날 밤에는 혼자 있어야 했다.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혼자 있어야 했다. 이것이 마법을 꿈꾸던 한 해의 시작이었다.

 

48

프로이트 - 애도와 우울증(1917)

멜라니 클라인 - 애도와 조울증(1940)

 

49

나는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생각하고 바라면 이야기가 뒤집히고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은 나 자신에게조차 비밀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매우 절박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51

나는 나머지 신발들을 처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그곳에 서 있다 이유를 깨달았다. 그가 돌아오면 신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의 실체를 깨달아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 모습을 깨달아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소망이 효력을 잃었다고 결론을 내릴 마음이 (그러니까 신발들을 처분할 마음이) 아직 없었다.

 

60

나는 어렸을때부터 괴로운 시기에는 읽고 배우고 노력하고 문학에 매진하도록 훈련받았다.

 

63

유족들은 본래 보호막이나 담요가 몸을 감싼 듯한 기분일 수 있다. 옆에서 느끼기에 그들은 잘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현실이 아직 인식을 파고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실을 인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 여기서도 '굉장히 침착한 보호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73

소산 : 프로이트가 사용한 정신분석 용어. 정신적 외상을 입힌 사건에 결부되어 있던 감정이 그 사건의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또는 정신치료를 받는 중에 깨끗이 제거되는 방출의 순간을 말한다.

 

74

난 '죽음의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없어요. 옆에 있었으니까. 난 '소식'을 듣지고 못했고, 시신을 '확인' 하지도 않았어요. 옆에 있었으니까. 나는 자제하며 멈춘다. 나는 지금 샬러츠빌에 있는 생면부지의 볼칸 박사에게 불합리한 분노를 퍼붓고 있다.

 

78

과거에는 워낙 흔한 일이라 친숙했던 죽음이 뒷전으로 물러나 사라지게 되었다. 부끄럽고 금지된 일이 되었다.

 

79

죽은 먹을 수 있었다. 죽만은 유일하게 먹을 수 있었다.

 

88

'감기' 가 어떻게 전신감염으로 바뀔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이 질문은 무기력한 분노의 외침이었고, '모든 게 평소와 다름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를 다르게 표현한 말이었다.

 

89

"환자분의 상태가 정말 안좋습니다" 나는 그것이 죽을 가능성이 많다는 암시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앗다. 좋아지고 있는 거야. 왜냐하면 좋아져야만 하니까.

 

96

얼마 전에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에게는 그런 표정을 지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표정이 있다. 나는 내얼굴에서도, 다른 이의 얼굴에서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다. 너무나 약하고 무방비하며 여린 표정. 안과에서 나와 밝은 햇빛과 마주치거나 쓰고 있던 안경이 갑자기 벗겨졌을 때의 표정.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은 자신을 투명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바비인 것처럼 보인다.

 

96

<로즈 에일머>의 마지막 두 문장에 담긴, '냉혹하면서도 달콤한 진리'가 나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었다. 나는 '추억과 한숨의 하룻밤' 이상의 것을 원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나는 그를 돌려받고 싶었다.

 

101

인생은 빠르게 변한다.

인생은 한순간에 달라진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기도 한다.

자기연민의 문제.

 

105

지금 어디 있느냐는 게 아니야. 죽은 지 7년이 지났으니까. 그때 어디 있었냐는 거지.

 

118

그러다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때 뒤를 돌아보았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야기소리가 들리다 끊겼을 때 고개를 드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인생은 한순간에 달라진다. 평범한 어느 순간에. 퀸태나가 아스팔트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129

곁에 있겠다는 약속. 내가 보살피겠다는 약속. 괜찮을 거라는 약속.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151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곱씹는 시간이 없도록 했다.

이제 걱정 마 엄마가 있으니까.

 

177

네가 걱정했잖아. 나는 너 걱정하는 거 싫어.

J.J 로서는 이것이 사랑고백과 가장 가까운 표현이었다.

 

179

왜 항상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해?

왜 항상 끝까지 지지 않으려고 하지?

이번 한 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자.

 

183

그때까지 나는 비통해했을 뿐 애도하지는 못했다. 비통은 수동적이었다. 비통은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었다. 애도는 비통한 마음을 처리하는 행위이자 주의와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186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존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존과 대화라는 것을 나눌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말 한마디로 그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어떤 말 한마디가 그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내가 늦기 전에 그 말을 했던라면 효과가 있었을까?

 

189

두 사람 모두 해방감과 안도의 한숨과 문제 해결의 표현으로 오해 사기 십상인 '오랜 투병생활 끝에' 라는 말이 적용되는 경우였다.

 

189

오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늘 죽음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닥쳤을 때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공허한 상실감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흑과 백의 문제였다. 두 사람 모두 마지막 1초까지 살아 있다 눈을 감았으니까.

 

190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상황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사실 이것은 자기모순에 빠질 만큼 뒤죽박죽인 사고방식이었다.

 

193

살아남은 사람들은 과거를 돌이키다 못 보고 지나친 징조들을 발견한다.

 

193

내 자동응답기에서는 아직도 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 존의 목소리로 녹음되어 있는 것은 자동응답기를 마지막으로 설정한 날 누가 옆에 있었느냐에 따른 임의적인 결과지만, 나는 이제 응답기를 다시 녹음해야 할 때가 되면 그를 배신하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203

분노와 책임감을 동시에 느낄수도 있을까?

나는 정신과 의사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어떤 대답을 들을지 알고 있다. 분노는 죄책감을 낳고 죄책감은 다시 분노를 낳는다는 뻔한 맥락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204

나는 꿈을 꾸거나 글을 써야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걸까?

 

206

알람시계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멈췄는데 수리를 할 수 없었고, 이제는 그가 세상을 떠났으니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내 침대 옆 협탁에서 치울 수도 없었다.

 

210

여름의 언젠가부터 나는 연약하고 불안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샌들이 보도블록에 걸리면 넘어지지 않게 몇 걸음 껑충껑충 뛰어야겠지? 만약 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넘어지면 어떻게 될까? 어디가 부러질까? 다리를 타고 흐르는 피를 누가 보게 될까? 누가 택시를 잡아줄까? 응급실에서 누가 내 곁에 있어줄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가 옆에 있어줄까?

 

215

그리고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전 세대의 노래에서 추구하는 논리의 바탕은 자기연민이었다. '희망의 조짐을 찾는다'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구름이 자신의 앞길을 가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폭풍을 뚫고 꿋꿋이 걷는다'는 노래를 부른느 사람은 그러지 않으면 쓰러진다고 생각한다.

 

215

나는 평생 나를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나를 불안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자기연민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런 입장은 꿋꿋하게 유지되었다.

 

224

1955년의 기억의 편린들이 어찌나 조각조각이던지 붙잡고 있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열심히 기억을 떠올렸다. 1955년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존이나 퀸태나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236

알고 보니 비통함이란 막상 겪기 전에는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상상속이 죽음이 현실화되고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난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며칠이나 몇 주의 본질을 오해한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치면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충격이 심신을 말소시켜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새악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실감으로 쓰러지고 무너지고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침착한 보호자'가 남편이 곧 돌아오면 신을 구두가 있어야 한다고 믿을 만큼, 말 그대로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237

장례식 그 자체는 진통제이며, 다른 사람들의 보호와 장례식의 무게와 의미에 파묻혀 일종의 최면성 퇴화를 경험하는 때라는 사실을 알 방법도 없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이후에 찾아오는 끝없는 부재와 공허, 무의미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될 잔인한 순간의 연속(상상 속의 비통함과 실질적인 비통함의 가장 큰 차이가 이런 것들이다)을 알 방법도 없다.

 

237

어렸을 때 나는 '무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무의미가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단어였다.

 

241

자기연민은 성격적인 결함중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보편적으로 손가락질당하는 것이며, 귀찮은 파괴적 성향이 기정사실로 간주된다.

 

243

나는 비통한 심정이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비슷한 이유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243

습관이 되어버린 수많은 충동들이 좌절당하기 때문이다. 지근까지 수많은 행동과 수많은 감정과 수많은 행동의 대상이 H여싿. 그런데 이제 타깃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습관처럼 시위에 화살을 걸다 문득 깨닫고 활을 내려놓는다. 걷다 보면 H가 생각나는 길이 너무 많다. 나는 그중 한 길을 걷는다. 그런데 이제는 길 위에 넘지 못할 기둥이 가로놓여 있다. 예전에는 길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막다른 골목이 너무 많다.

 

즉, 관심의 대상이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반복되니 자연스럽게 자기연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244

나는 작가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유추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가 곁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랄때면 우리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침묵이 더욱 강하게 인식된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상상과 편집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로서는 그의 대답이 내 편집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이 불쾌한 권리침해처럼 느껴진다.

 

245

우리는 알고 싶지 않은 경우에도 서로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지만, 이제와서 보니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고 있었다.

 

245

나한테 무슨일이 생기면.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아무 일 없을거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만약 그러면.

만약 그러면. 그는 말을 잇곤 했다.

 

255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성적인 차원에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가 만약 이성적인 차원에서 움직였다면, 엉뚱한 상상을 일삼지 않았을 것이다.

 

257

날마다 조금씩 더 사랑해. 당신이 나한테 늘 했던 말처럼.

 

257

나는 부검보고서를 읽은 뒤에야 자동차의 충돌과 죽은 별의 붕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중단했다. 보이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못했을 뿐 붕괴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262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야 상황이 조금만 좋아져도 기뻐할 수 있다.

 

269

나는 월해 12월과 1년 전 12월의 비슷한 부분을 찾는 데 점점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1년 전이 훨씬 선명하고 또렷하다. 비슷한 부분은 많다.

 

282

이 글을 끝내고 싶지 않다. 한 해를 끝내고 싶지도 않다.

광기는 점점 줄어들지만 명료함이 빈자리를 채우지는 않는다.

 

283

작년 이날에? 작년 이날의 기억에는 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난생 처음으로 깨닫는다. 작년 이날은 2003년 12월 31일. 존은 1년 전에 이날을 겪지 못했다. 존은 고인이었다.

 

283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내 일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질거라는 깨달음이 오늘 렉싱턴가에서는 어찌나 선명한 배신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달려오는 차들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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