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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이영주 |2006.09.30 03:10
조회 40 |추천 0

'이터널 선샤인'이란 영화가 개봉했을 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로맨틱코미디를 싫어하진 않지만, 자막까지 읽어내는 고통(!)을 수행하며 보고픈 맘은 들지 않았다.

더구나 '이터널 선샤인'이라니, 영화는 물론이고 유행가 가사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고, 또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 영원불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면 더더욱.

그러나 세간의 평은 의외로 꽤 괜찮았다. 범상치 않은 수작秀作이란 이야기가 들려왔다.

물론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미 놓친 뒤였다.

 

그리고 지난 주말 처음 가본 평택 번화가의 디비디방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만났다.

영화가 끝난 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Bravo~ That' O.K!

 

코미디배우로 익히 알려진 짐 캐리의 사뭇 진지한 로맨스도 신선했고, 여전히 타이타닉의 로즈로 기억에 남아있는 케이트 윈슬렛이 보여주는 즉흥적이고 푼수 기질이 다분한 천방지축 처자 연기도 즐거웠다.

그러나 이터널 선샤인이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수히 많은 영화들이 사랑과 연애, 이별과 기억을 다룬다. 순정파 로맨스 영화들은 영원불변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홍상수 류의 까칠한 영화들은 사랑의 덧없음을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그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아니, 모든 범주에 속하는 이야기를 한다.

 

사랑, 그 짜릿한 기억...

 

이 영화는 제목처럼 따뜻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포근한 것인지, 주인공 조엘(짐 캐리 분)의 기억회로를 거슬러 올라가며 깨닫게 한다.

연애의 진행을 거꾸로 되감는 이 영화의 화법은 현재의 지리멸렬한 관계 역시도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했던 시간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알려준다. 조엘의 기억회로를 보며 (기억 삭제를 중단하려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투와는 관계 없이 ^^;;) 관객들은 자신이 지나왔던 짜릿한 연애의 기억을 생생해 되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 나 그때 그렇게 행복했어. 맞아, 우리 그땐 정말 좋았잖아?

 

사랑은 변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참으로 건조하다.

얼어붙은 찰스강에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과 함께 드러누워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말하는 조엘. 연애영화에서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장면이었지만 찰스강 씬이 가슴에 콕 박히는 것은, 이미 영화 도입부에 이들의 결별을 전제로 이 장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전제한 뒤 과거 아름다웠던 기억으로 떠난 여행(?)은 그 장면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절절하면 절절할수록, 현재의 지리멸렬한 결말이 도드라져 보이게 할 뿐이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연인도 결국엔 그렇고 그렇게 결론나는 게 사랑이고, 연애라고 건조하고 무심하게 툭툭, 내뱉어 버리는 까칠함의 매력이란.

 

 

다시 처음 혹은 마지막으로 돌아와, "그래도 사랑할래?"

 

이 영화가 만약 헤어진 연인이 괴로움을 덜기 위해 연애의 기억을 지우다가 과거의 첫 마음을 발견하고, 다시금 사랑을 되찾는다...는 식의 결론을 내렸다면,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아까운, 참으로 안타까운 영화가 됐을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모든 기억을 삭제한 뒤 돌아온 곳은 처음이다. 연애의 기억도,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호감이 비호감으로 변해버린 짜증과 지루함의 기억도 없는 무구한 마음이다. 아무런 기억이 없는 두 사람은 마치 처음처럼 다시 사랑을 느낀다.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그러나 기억을 삭제했다고 해서 과거의 시간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되지는 않는 것. 그들은 '처음'으로 돌아와 사랑을 느끼는 순간 그들의 '마지막'을 만나고 만다.

클레멘타인의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에 매력을 느낀 조엘은 바로 그 점 때문에 클레멘타인을 혐오하게 될 것이고, 조엘의 착하디 착한 심성과 반듯한 생활에 호감을 느꼈던 클레멘타인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조엘을 따분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불행으로 귀결되는 마지막 각본을 이미 손에 쥐어버린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어찌할 것인가.

이것은 조엘과 클레멘타인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연애 각본의 결론이기도 하기에 그들의 선택은 나의 선택이고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at's O.K...!!!

 

그래... 사랑은, 연애는 그렇다.

처음의 떨림과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의 무엇이 결국엔 나를 짜증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 결국 연애란 그렇고 그런 것이니 아예 관두는 게 현명할까?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은 결국은 지리멸렬한 연애, 불행한 이별로 결론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생긴 사랑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행복 아니겠냐고 이야기한다.

"나중엔 난 너를 따분하게 여기고 넌 나를 황당해할 게 분명한데"라고 말하는 클레멘타인에게

"괜찮다"고 웃으며 말하는 조엘, 그는 분명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이 영화를 흐뭇하게 감상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이란 유한한 것'이라는 진실 뒤에 몸을 감추고 사랑의 감정보다는 손익계산서를 먼저 작성하고 마는 삼십대 중반의 메마른 처자로 살고 있다.

지금 이곳에 아픈 기억만 쏙쏙 뽑아 삭제하는 기술을 가진 라쿠나사社가 있다면, 지나간 사랑의 아픈 기억이 아니라, '사랑이란, 연애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기억부터 지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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