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볼 수 있을 때
-호텔 르완다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이 되는 르완다내전은 전체 인구의 8분의 1인 100만명 가량이 살육당한 마음이 아픈 사건입니다. 90%에 이르는 후투족이 10%밖에 안되는 투치족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왜 이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원래 르완다는 두 종족, 다수인 후투족과 소수인 투치족으로 이루어진 왕국으로 평화롭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서로는 이질감을 갖지 않고 종족의 구분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99년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식민지로 살다가 1919년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전하면서 국제연맹의 위침을 받은 벨기에가 식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후투와 투치의 차이
벨기에 총독부가 식민지 통치를 하면서 당시까지 지배계층을 형성해온 투치족을 우대정책을 가지고 중간 지배계층으로 활용하였는데 후투족과 차별화하는 정책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나오는 얘기지만 흑인이지만 밝은 피부를 갖고 있고 코가 약간 더 좁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참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이로 인한 두 종족간의 갈등은 깊어져가다가 벨기에가 식민지 지배를 그만두게되고 그동안 눌려왔던 후투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갈등이 터지고만 것입니다. 더욱이 화합을 얘기하는 후투족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으면서 모든 화살이 투치족에게로 돌려졌고 대학살이 시작된 것입니다. 영화는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만들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도데체 어떤 차이가 있고,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얼마나 이념이 무섭고 편견과 자기라고 하는 이념이 무섭습니까? 후투와 투치의 차이? 없습니다. 심지어 벨기에 식민정부는 구별이 힘들자 콧구멍이 크기를 자로 재기까지 했다는 얘기에서 가슴이 떨리고 비참해지는 느낌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거에도 우리는 흑인을 깜둥이라고, 혼혈아를 튀기라고 놀렸고, 장애를 겪고 있는 지체들을 병신이라고 놀렸습니다. 지금은 힘들고 우리보다 경제소득이 낮은데서 온 해외노동자들을 그런 시각으로 쳐다봅니다. 컨테이너에 가두고 부당한 이익을 취합니다. 도대체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후투와 투치의 차이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정말 우리 안에 그런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테리 조지 감독이 한 연출의 변이 깊이 동감됩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관객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이같은 배경을 가진 영화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할 때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별다섯짜리 특급호텔인 밀 콜린스의 지배인인 폴 루세사바기나가 아이들을 포함해서 투치족 1,268명의 목숨을 구한 사건은 아프리카판 “쉰들러 리스트”로 불릴만큼 아름다운 실화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낭만적으로 폴 루세사바기나를 아름답게 말하고, 영화 역시 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그리고 있지만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폴의 투치족 1,268명을 구한 사건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래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 가족 중심적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주변의 이웃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웃 빅터가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할 때 폴은 아내에게 냉정하게 말할 뿐입니다. “가족은 아니잖아. 중요한 건 우리 가족이야. 내 판단에 맡겨.”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이 투치족 천여명을 살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보게 될 때
폴 루세사바기나가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자신의 직장 그리고 호텔의 품격만 염두에 두던 사람에게서 1,268명을 구하는 기막힌 영웅으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영화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화의 시점마다 있었던 몇가지 중요한 장면들을 통하여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고아들을 한 명이라도 살리려는 외국인 아처, 그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던 신부와 수녀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폴 루세사바기나가 본 것 때문입니다. 그가 보았던 수많은 죽음들, 죽음의 공포에 질려있던 눈동자들, 그 처절한 눈동자들과 불쌍한 주검들이 그 안에 잠자고 있던 영혼을 깨운 것입니다. 그 끔직한 광경들은 그 안에 있던 자기 연민과 자기 사랑을 깨부수고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나태함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자기 연민 역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통스러운 아픔과 비참함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습니다. 부모를 잃고 고통당하는 소년소녀가장을 보지 않고, 길에 흩어져있는 희망잃은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다. 고통당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외면하고 장애로 힘들어하는 이들의 눈을 응시하지 않습니다. 자기 문제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로운 시작과 결의는 볼 때 가능합니다.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 세상의 눈물을 보아야 합니다. 더더욱 그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할 때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진 사람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아픔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