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패배를 마주하는 일은 쓰라린 법입니다. 질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가 원한 건 일말의 희망이었으니까요. 내주고 만 골이 단 하나라서 더욱 아쉬움이 남네요. 선수들, 정말 잘 했습니다. 하지만 지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앞으로의 여정은 결국 더욱 험난해 졌고 더 큰 고비들이 기다리고 있겠네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또 다시 희망을 가져야죠.

수원, 빅버드를 다녀왔습니다. 결코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길이었지만 수원월드컵경기장은 언젠가는 한 번쯤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곳이었고 수원행은 경기 일정표를 보며 한 달 전부터 기다려 온 일정이었습니다. 경기가 열리기 삼일 전에 왕복 기차표까지 예매를 했구요. 하지만 경기 전날 발표된 선수명단은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저의 계획에 큰 고민을 던져주었습니다. 질 것이, 그것도 울산이 수원에 이렇다 할 포효를 해 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질 것이 너무도 뚜렷해 보이는 명단이었거든요. 하지만 계획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기적을 꿈꾸었죠. 절박함 속의 환희는 더욱 달콤한 법이니까요.
9:35분 무궁화 호 기차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린 끝에 수원역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크고 번잡하더군요. 서울역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KTX도 들어오지 않는 터라 수원역은 그렇게 크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습니다. 역 내부와 역 주변을 대충 둘러본 뒤 사전 조사한 대로 북측정류장(맞나??)에서 월드컵 경기장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720-1번 - 그런데 수원버스는 2인 이상 할인이 되나요? 같이 타는 사람들 보니 카드 찍고 잔돈 내고 이러던데...) 아주대학교 앞에서부터 가로등 깃대에 블루윙즈 깃발이 쭈~~욱 걸려있는데 놀랍더군요. 울산은 경기장 앞에도 축구와 관련 없는 다른 행사 깃발이 걸려 나풀거리죠. 수원=축구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도시 곳곳에 노력을 기울인 듯 해 보였습니다.

한 30분 정도 지난 후에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내렸습니다. 그 중간에 수원 레플리카와 머플러를 팔목에 두른 세 명의 사람과 그 주변의 무리들이 버스에 합승하더군요. 왠지 모를 긴장감. ㅎㅎ 아직 경기 시작까지는 두 시간정도 남아서인지 그렇게 분주하지는 않았지만 일찌감치 부터 경기장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더군요.
일단 기자석 쪽으로 들어가 정현이랑 인사하고 숟가락이 없는 도시락을 먹은 뒤, 경기장 구석구석 탐색에 나섰습니다. (미디어 패스를 굳이 교환하지 않고 기자증을 가슴에 차고 다니니 별 제제가 없더라구요.) 뭐 대충 수원 경기장의 밖 분위기는 어떤지, 풍경은 어떤지, 또 그라운드로 들어가는 길은 어떤지, 기자실은 어디에 있는지 등등. 자주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닌 만큼 최대한 이것저것 보고 싶었습니다. 라커룸이 있는 1층에서 김대길 해설위원과 소대현 주무 만나서 잠시 이야기하고 (경기장으로 이어지는)게이트를 지나 피치를 잠시 밟았습니다. 몸을 풀고 있는 양 팀의 선수들과 조금씩 사람들로 메워져 가는 관중석을 그라운드에서 바라보니 기분이 왠지 모를 긴장감과 비장함이 온 몸을 감싸더군요.

경기장 탐색을 마치고 다시 꼭대기에 있는 기자석으로 올라왔습니다. 임지오 울산 홍보팀장님이랑 야후! 월드컵 때 잦은 컨택을 했던 이철규씨도 잠시 만나고 대충 기자석의 분위기를 살핀 뒤 정현이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수원에서 올 때만 해도 써포터석에서 응원을 할 생각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원정 처용들의 수가 너무 적어서 포기했습니다. 혹시나 제가 거기 서 있다가 티비에 나오면 안 될 일이거든요. ㅡ.ㅡ;;
선수들이 입장하고 경기장은 더욱 더 소란스러워졌습니다. N석에서 ‘승리’라는 그랑블루의 카드섹션이 이어졌구요. 그랑의 카드섹션은 그 내용이나 모양 자체는 그리 멋지지는 않았지만 K-리그에서 그런 퍼포먼스를 펼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음악선곡이나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경기에 대한 긴장감과 경기장의 분위기를 한껏 높일 수 있는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건데요. 영화에서 나온 비장한 느낌의 음악과 관중들의 함성을 독려하는 멘트 등은 정말 관중들이 경기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더라구요. 솔직히 그러한 세심한 준비들이 내심 대단하고 부러웠습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경기 시작 휘슬이 울렸습니다. 약자가 강자를 쓰러뜨리는 이변이 유난히 많은 축구인데 그러한 이변의 흐름에는 약자의 ‘정신력’과 ‘조직력’이 분명 뒷받침 돼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날 울산은 그런 이변도 기대하기 힘들었죠. 정신력은 둘째 치더라도 조직력, 도저히 올 시즌 내내 한 번이라도 발을 맞춰 봤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선수들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데 어떤 힘을 기대하겠습니까.........만....... 정말 이성적으로는 절대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할 울산의 전력이었지만 그렇다고 ‘언제 골을 먹고 몇 골을 내 줄까’라는 생각으로 축구를 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울산 선수들, 호흡은 잘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대이상으로 잘 해주었습니다. 자연히 경기의 주도권은 수원에 내 주었지만 조세권, 서덕규의 베테랑 수비진, 김지혁 골리는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주었고 전반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마차도를 축으로 간간히 이어지는 역습도 순간순간 저의 탄식을 만들어 냈구요.
하지만 일방적인 열세의 흐름에서 90분 동안 방패를 내리지 않는 다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더군요. 하프타임 때 이철규기자의 예언처럼 결국 한 골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백지훈의 슛은 너무나 영리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전반전을 본 뒤 내심 무승부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너무 아쉽더라구요. 선수들은 분명히 화려한 스쿼드의 수원을 상대로 기대 이상의 플레이를 펼쳤지만 ‘역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몇 신인들은 역시나 과도한 긴장을 한 모습이 역력했구요. 사우디 원정을 다녀 온 선수들의 체력저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날 승점을 챙기지 못함과 동시에 수원을 더욱 앞서가도록 하면서 플레이오프진출이 꽤나 힘들어 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주전과 백업의 기량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확인 한 점, 후반 교체투입 돼 팀에 힘을 불어 넣어준 이현민의 활약 등은 이날 패배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덜게 해 준 것들이었습니다.
경기 내내 이어진 그랑블루의 응원은 정말 전율을 느낄 만큼 대단했습니다. N석 1층을 꽉 채운 큰 규모와 우렁찬 목소리는 그들의 뜨거운 열정을 충분히 대변해 주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며칠 동안은 잊혀 지지 않는 영화 속 비극처럼 그랑의 응원가가 제 귓전을 맴돌면서 패배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나가뒈져라’만 안하면 정말 최고의 써포터라고 인정해 줄 수 있었겠는데, 조금만 마음에 안든다 싶으면 뱉어내는 네거티브 응원은 열정적인 써포팅의 가치를 그대로 반감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림과 동시에 경기장을 나섰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끝까지 남아 패배의 아픔을
곱씹고 싶었지만 시간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19:59분에 있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수원역에 도착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정작 나중에 보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는...) 경기장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니 나이 드신 기사 할아버지께서 ‘오늘 축구 있었나 보구나’라고 운을 떼시더군요. 수원역에 도착하는 동안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역내의 스포츠 팀에 대한 자부심이 꽤나 대단하셨습니다. 수원이나 야구의 현대나 두 팀다 올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으니... 제가 울산에서 왔다고 살짝 ‘도발^^’을 하니 그 이후에는 말씀을 별로 안 하시더라는....ㅡ.ㅡ;;
울산이 무승부라도 거두었다면 그래도 기분 좋게 부산까지 올 수 있었겠지만 결국 졌으니 아쉬운 감정은 쉬 사그러들지 않더군요. 제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죠. 그래도 난 생 처음 수원이란 곳에 가서 꽤나 괜찮은 승부와 흥미로운 것들을 보고 왔으니 어렵게 택한 여정에 대한 후회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 다음 주 내내 이어질 금전적 압박은 ‘절약정신’으로 이겨내야 할 적으로 남겨졌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