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26
한비야 -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오늘을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거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불평하기보다는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충분히 즐기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풍요로워지는 것.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확실한 오늘을 무시한 채 지나간 어제나 불확실한 내일을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 나약한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25년도 넘은 친구 김혜경 테레사는 내 친구이자 우리 집 수양딸이다. 우리 엄마는 이 친구가 수녀원에 들어가자마자 이름 대신 '수녀님'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하셨다. 엄마가 이 세상에서 용돈 주는 사람이 딱 세 사람이었는데 큰조카 형석이, 막내 조카 재혁이 그리고 이 친구다. 엄마 돌아가시는 날, 혜경이가 아니었으며 정말 큰일날 뻔했다. 그날 밤 혜경이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집에 와서는 밤샘 묵주 기도를 하고 있었다. 새벽녘에 엄마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자고 있는 우리들을 깨웠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임종도 못할 뻔했다. 엄마가 이럴 줄 아시고 이 친구를 그리 예뻐하셨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늘 놀랍다. 혜경이는 내게 소중한 친구이자, 자매이자, 수도자이자, 인생 상담원이자 스승이다. 무엇보다도 인생 길을 같이 가는 아주 따뜻하고 든든한 동반자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망설임이나 부끄러움 없이 어떤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다. 특히 원칙을 지키며 불이익을 당할 것인가, 세상과 타협해 이익을 볼 것인가 흔들릴 때 나는 반드시 이 친구를 찾는다. 나에게 혜경이는 함석헌 선생의 시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진정으로 무슨 일이 하고 싶은가를 알려면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이 순서다. 그러려면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친구를 새로 사귈 때 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자기 자신과도 잘 사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물론 일기다. 글로 마음을 정리하면서 내 안의 나와 쉽게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우표 붙인 정식 편지를 보내는 것도 내가 오랫동안 애용해온 방법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주 좋다. 자연과 만나면서 혹은 일상이 아닌 상황과 사람을 만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나를 보는 것은 괴롭고도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를 만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이다. 내 마음이 나에게 무슨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지를 늘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종교가 있는 사람이라면 신의 목소리, 없는 사람은 우주의 소리라고 부른 그것이 우리에게 늘 힌트와 메세지와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 이제 당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일이 아주 엉뚱한 것일 수도,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을 수도, 혹은 흔히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제외시켜놓은 것도 있을 수 있다.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을 거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완벽한 지도를 가져야 길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위대한 성인이나 비범한 사람들이야 가야 할 길이 시작부터 끝까지 뚜렷이 보이겠지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하나의 길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길이 보이는 거니까. 하찮은 일이라도 좋다. 원래 하려고 했던 일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여도 좋다.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그 일을 시작하는 거다. 그러면 그 길이 다른 길로, 그 다른 길이 다음 길로 이어져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다고 굴뚝같이 믿는다. 항상 마음의 소리게 귀기울이고 있다면 말이다.
내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몸만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것이고 오지 여행가에서 긴급 구호 활동가로 넘어가는 거다. 익숙한 것들과 이별해야 하는 시간이고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시간이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낯익은 것과의 이별이 두렵지 않은 것처럼 낯선 것과의 만남 역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길, 이 길도 나는 거친 약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떠난다.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지도란 없다. 있다 하더라도 남의 것이다. 나는 거친 약도 위에 스스로 얻은 세부 사항으로 내 지도를 만들어갈 작정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늘 잊지 않는 마음이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오늘도 한 걸음씩 걸어가려 한다. 끝까지 가려 한다. 그래야 이 길로 이어진 다음길이 보일 테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향하여 한 발짝 한 발짝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