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2시 30분
일어난다. 기지배군은 없다. 영화를 보러 간 것 같다. 씻고 나왔더니 기지배군이 혼자 영화를 보고 나왔다. [악어] 어땠느냐고 묻는다. 침울한 기지배군. 남포동 쪽에서 하는 영화는 왜 이리도 난해하냐고 울상이다.
오후 3시 20분
육수 맛이 여태 먹었던 어느 집보다 일품인 원산면옥에 다시 들러 점심을 먹고 어제 왔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4시 영화 [황금의 문]을 기다린다. 기지배군은 알랭드 보통 소설에 푹 빠져있고, 나는 밀린 여행기를 적느라 정신 없다. 몸이 가볍다. 어제 잠을 푹 잔 탓이다. 나의 친동생인 똥구뇽군의 찬조금이라며 기지배군이 지갑에서 10만원 수표 한 장을 나에게 건네준다…아니 뭐 이런 걸 다…고마운 동생 똥구뇽군…
[황금의 문]
감독 : 엠마누엘레 크리알레세
베니스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 감독이 한 표를 던진 영화라기에 이번 영화제를 통해 관람하려고 예매했던 영화이다. 영화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신천지로 생각하는 미국 입국을 위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인데, 일단 재미가 넘친다. 뒤로 갈수록 더하다. 본격적으로 미국 입국시험장에서 여러 절차의 입국 심사를 거치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영화의 기쁨과 슬픔이 차곡차곡 쌓인다. 와…미국 들어가기 어렵다. 심사는 합리적이고도 깐깐하다. 그 검사에 거부 반응을 느끼고 미국이 곧 신이냐고 되묻는 할머니가 있기도 하고, 할 일도 많고 땅도 넓은 곳이라고…새로운 문명에 대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영화는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 즉,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리 정치적이지 않은 것. 그것이 극을 소소한 재미로 끌어가며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이상에 대해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다. 좋은 영화다.
오후 7시
남포동 베니건스.
한번 쯤은 호화스럽게 먹자고 베니건스 왔다. 영화제에서 베니건스는 호사스러운 식당이란 말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몬테크리스토 백작이 텍사스에서 스테이크를 미디엄으로 구워서 갖다 주었다. 다음 영화는 9시다.
막간을 이용해서 사진을 찍는다...[타짜]보다 빠른 손이닷! 후후...
기지배군
르네군
오후 9시
남포동에서 장산역 프리머스까지는 지하철로 거의 50분 정도 걸린다. 부산이 양 옆으로 길어서 그렇다. 이동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기지배군에게는 프리머스가 처음이다. 오늘의 마지막 영화 [만사가 귀찮아]를 관람하기 위해 입장한다.
[만사가 귀찮아]
감독 : 폴 폭스
이 영화의 원제는 Everything’s gone green이다. 어떻게 한글 제목을 만사가 귀찮아…로 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한글 제목이나 안내 책자의 시놉을 보면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식의 전개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실망이다. 주인공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사행으로 돈을 버는 타락에 물들었다가 뉘우친다는 보통의 내용이고 따라서 평작 수준이다. 이 영화가 캐나다 본토 이외에 다른 곳에서 상영되는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초청된 것인가…게다가 영화는 너무 친절하기까지 하다. 영화의 주제나 들어간 씬의 의도를 등장 인물들이 너무 직접적으로 자세히 설명해줘서 따분하기까지 하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품은 아니지만 평범한 수준이다.
오후 10시 40분
운 좋게도 이 영화 역시 깜짝 GV가 있다. 안 그래도 기지배군에게 너는 GV 한 번 못 보고 올라가게 생겼다…라고 아쉬움을 표현했었는데 다행이다. 배우는 오지 않았고 감독인 폴 폭스만 참석해서 질문을 받았다. 젊지도 않은 감독이다. 질문에는 성실하게 답을 해주는 것이 맘에 들긴 했다.
오후 11시 30분
내일 영화 두 편을 보고 서울로 올라간다. 마지막 날이니까 찜질방을 전전하지 말고 숙소를 잡기로 한다. 해운대 오션 타워 옆으로 숙소를 잡았다. 제길…남자와 모텔을 잡는 것이라니…아무튼 숙소를 잡고 마지막 밤이기에 해운대로 향한다. PIFF 파빌리온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야외무대와 관객 카페, 홍보 부스들이 설치되어 있지만 밤이라서 문을 닫고 조용하다.
바닷가에 왔으니 개폼 잡고 사진도 찍어본다.
기지배군
르네군
편의점에서 맥주 두 병을 사서 바닷가에 앉는다. 어딘가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온다. 하얀 모자를 쓴 아저씨 한 분이 바닷가를 거닐며 구슬픈 하모니카를 분다. 이것도 바닷가이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좋은 분위기다. 기지배군은 배우이고 나는 감독 지망생이다. 둘 다 출발선에 있다. 밤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결국 생각만으론 성과를 낼 수는 없기에 우리 둘 다 서둘러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실력이 있다면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들이대야 한다…조금 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열정을 쏟아보자…그 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내후년엔 우리도 초청 받아서 오자…뭐…이런 살가운 얘기들…밤이 깊어간다.
새벽 3시 20분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추워서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었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밤이 이렇게 저물어간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할 때와는 달리 5일이 금방 지나간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간다. 가는 날까지 근성 있게 영화보고 후회 없이 올라가자…나는 여행기를 쓰고 있고…TV 케이블에선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 마지막 장면이 방영중이다. 기지배군은 새끈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슬프고도 따뜻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