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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

이영주 |2006.10.18 13:55
조회 40 |추천 0

 더 월 (If These Walls Could Talk, 1996)
 감독  :  낸시 사보카, 쉐어

 

 

이 벽이 말을 할 수 있다면...

 

 

96년에 만든 영화를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았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영 페미니스트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캠퍼스 안에서 전위적인 실험을 벌였다. 지금 보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10년 전 민주광장이라 불리던 도서관 앞 광장(그 이름만큼이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많았던 공간이기도 한)에 콘돔과 월경대가 낱낱이 까발겨져 전시됐을 때의 충격이란! -_-; 그 실험을 지켜보는 입장이었던 나는, 한마디로 뜨악한 표정으로 무심한 척(!) 지나쳤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도 그때의 영 페미니스트들이 학교에서 상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보지 않았는데도, 이 영화는 무척 전복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거라 예상을 했던 것 같다. 동성애라든가, 여성의 자위라든가, 지금껏 금기시돼 왔던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매우 노골적으로 다루지 않았을까 추측도 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영 페미니스트들에게서 느꼈던 느낌은 매우 선정적(-_-;;)이다, 자극적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의 이슈파이팅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선정적 문구들이 겉은 엄연한 엄숙주의자(물론 속은 달랐지만 -_-;)였던 내 비위에 거슬렸던 게다.

물론, 지금의 나는 10년 전 나와 같지 않다. 엄숙주의로 포장된 남성중심주의의 가면은 벗어던졌다. 아니, 벗어던지려 노력 중이다. (워낙 묵은때라서 잘 벗겨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10년 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볼 생각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벗었나 보자, 뭐, 이런... ^^;;)

한데, 이 영화 전혀 선정적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아니, 자극적이긴 하다. 그런데 이 자극이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까지 후벼파는 깊은 통증이다. 가임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봤거나 고민하고 있거나 앞으로 고민하게 될 문제인 낙태에 대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의 존중이라는 어느 하나만 손을 들어주기엔 참으로 난감한 문제인 낙태에 대해, 이 영화는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으면서 생명존중이니 뭐니 그럴듯한 명분을 외치는 이들이 아니라, 실제로 낙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하는 바로 그 여성들의 입장에서.

 

1952_

결혼 뒤 1년도 안 돼 사별한 클레어. 슬픔으로 괴로워하던 중 친 동기간처럼 절친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시동생과 실수로 성관계를 갖고 임신한다. 50년대 미국사회에서 낙태는 불법이다. 그렇다고 시동생의 아이를 낳는 것 역시 받아들여질 리 없다. 클레어의 선택은?

직업이 간호사인지라 친한 의사에게 부탁도 해보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자구책으로 임신중 복용불가라 쓰여진 약을 한줌씩 먹거나 뜨개바늘로 질을 쑤시는 몸쓸 짓도 해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던 중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은 야메 낙태전문가(의사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에게서 믿을 수 없는 낙태시술을 받은 클레어. 결국 주방 바닥에 피를 쏟으며 쓰러진다.

 

1974_

낙태가 합법화 된 70년대 미국사회. 평범한 가정의 주부이자 늦깎이 학생인 바브라는 2남2녀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학생으로 살기가 버겁다. 하루종일 그녀의 손은 쉴 새가 없다. 그런 그녀에게 덜컥 날아든 임신 소식. 현재 상태에서 아이를 더 낳는다면 그녀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첫째딸은 엄마에게 당연히 낙태하라고 냉정하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바브라는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이미 뱃속에 잉태된 생명을 죽일 것인가, 뒤늦게 펼치기 시작한 꿈을 접을 것인가.

'여성문인들은 가사노동과 창작활동을 어떻게 병행했는가'를 논문 주제로 잡고 집안일에 바쁜 와중에도 열정적으로 공부를 하던 바브라는, 마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 양 "여성문인들은 가정이 없었다"고 지도교수에게 논문 포기선언을 하고 만다.

 

1996_

독실한 가톨릭가정에서 자란 크리스틴, 지도교수와 연애하다가 덜컥 임신을 한다. 크리스틴의 임신 소식에 아내가 있고, 가정을 깨뜨릴 마음도 없는 애인은 무심히 돈봉투를 내민다.

배신감과 수치심에 괴로워하던 크리스틴, 낙태 반대론자인 룸메이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결심하고 병원을 찾는다. 낙태 전문병원(?)쯤 되는 그곳에는 매일같이 낙태 반대론자들이 진을 치고 앉아 병원으로 들어가는 여성들을 만류하고 있다.

크리스틴이 낙태하러 간 그날, 병원 앞에서는 낙태 반대론자들의 규탄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친절한 여의사로부터 낙태시술을 받던 크리스틴은 눈앞에서 여의사가 낙태 반대론자의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이다. 여기서 wall, 즉 벽은 자궁 벽을 의미하기도 하고, 자궁(여성)과 사회가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낙태를 찬성하는 것은 곧 살인을 찬성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일견 생명존중의 마음을 가진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정작 낙태를 두고 갈등해야 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들을 생각이 없다. 그들이 왜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 낙태를 금지한 상태에서 오히려 더욱 번성하는 야메 시술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죽음에 몰아넣고 있는지 돌아볼 생각도 없다. 생겼으니 무조건 낳으면 그 이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마지막 장, 크리스틴이 여의사에게 낙태 반대론자들의 갖은 공갈 협박까지 무릅쓰고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의사는 대답했다. "불법 낙태시술로 불행한 여성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런 여성들이 더이상은 없어야 하기에."

 

낙태. 물론 아직 세상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자궁 속 태아의 생명도 소중하다. 하기에 함부로 낙태해라, 하지 마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자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생명 운운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본 뒤, 함께 본 몇몇 여자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 결국은 한 친구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상이 이 눈물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이 벽이 말을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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