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국 시대 ~ 에도막부 초기의 장수로써 덴몬(天文) 23년인 1554년에 태어났습니다. 출신은 일본 오미 지방의 아사이군 태생으로 야쓰히데의 장남입니다. 원래는 전국 시대의 통일을 구현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오른팔 되는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휘하로, 미쓰히데의 첫 출진인 단고의 쿠로이 성을 공략하는데 참전하여 큰 훈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 때의 전물로 적장 아카이 우에몬의 갑옷 가죽을 선사 받고, 그것은 현재에도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 후, 미쓰히데에서 다른 오다가의 가신인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시중들게 되어, 그의 밑에서 드디어 그의 재능의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와 같이 아사이 나가미사의 오미 코타니 성을 공격하며, 다른 장소인 하리마 미키 성의 공략에 참전하여 혁력한 공들을 세우게 됩니다. 이런 공들만 봐도 야스하루는 전투나 싸움에는 대단한 장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583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사의 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의 손에 안타깝게 죽은 직후, 오다 가문의 가신들 사이에서는 노부나가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커다란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남의 아들을 후계자로 옹립할 것을 주장하고, 오다 가의 또다른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를 옹호하게 되어 그 둘 싸움에 커다란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즈카타케의 전투로 여기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히데요시의 휘하 아래서 커다란 공을 세우게 되어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의 장수들과 더불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히데요시의 아래에서 커다란 공들을 휩쓸게 되며 스모토성 함략, 그리고 큐슈평정의 선봉을 맡아서 사가미 오다와라성 정벌을 하는 등 히데요시의 부하로써 그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봐도 암튼 일본 전국시대에 대단한 장수중의 한명이었습니다. 총을 잘 다루며 전투에는 최고의 용맹을 발휘하는 장수였습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 그 조선 파병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수군의 장수로써 출진. 이 때 맹활약을 떨치게 되고 한국사에서도 남원전투와 칠천해전으로 유명합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우리의 대 영웅 이순신 장군에게 크나크게 대패하게 됩니다. 게이쇼 2년인 1597년 조선 2차 파병 때에도 군선을 인솔해 또 다시 출전, 그 사이 후시미 성의 공사에도 열심히 혁공합니다. 그 후... 자신의 주군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게 되자, 일본에서는 또 다시 전운의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는 그 정무 능력이 탐탁치 않자, 이에야스를 위시로 하여 세력이 모이게된다. 그리고 결국 도요토미의 휘하인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과, 관동의 대영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의 싸움이 일어나며 이것을 세키가하라의 전투라 칭합니다. 이 때 와카자카 야스하루는 히데요시의 장수로써 서군에 참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싸움의 절반은 동군에 호응하며 정보를 흘리거나, 동군의 싸움에 유리하게 진행되게 하는 일들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 즉 동군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지게 되고, 그는 이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혁력한 공으로 전후 영지가 안도되어 게이쇼 14년인 1609년에 타츠노 지방 오스번의 5만 3500석의 영주가 됩니다. 그리고 겐나 원년인 1615년에 조용히 은거, 1626년 에도 막부 초기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고, 교토 묘신사에 매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