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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宦官), 만들어진 제 3의 性-궁형

이양자 |2006.10.19 17:21
조회 53 |추천 0


 

 

환관, 만들어진 제 3의 性

 

(8) 궁형 (宮刑)

 

또 다른 환관의 공급원은 궁형이라 하는 육체적 형벌이었다. 환관이라 하면 반사적으로 궁형을 떠올릴 정도로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됨은 궁형 자체가 환관공급의 본령(本領)으로 간주되어 온 때문이다.

궁형이란 고대의 형벌이었던 5형(五刑)의 하나이다. 고대의 5형(五刑)이 어떤 형태였는가에 대해선 다양한 설이 있으나 유교경전의 하나인 《서경(書經)》에 의하면 오형이란 문신, 코자르기, 다리절단, 거세, 사형을 가리킨다. 이중에서 궁형이 거세를 지칭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궁(宮)은 성기를 의미한다. 한편 이 형벌은 음형(淫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원칙적으로는 남녀가 불의(不義)를 범했을 경우에 적용된다. 따라서 5형(五刑)중에 이 궁형만은 당연히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형벌의 방법이 서로 달랐다.

불의라는 의미는 보편적으로 일컫는 불의밀통(不義密通)과는 성격이 다른, 정식으로 결혼절차를 밟지 않은 남녀의 관계를 말한다. 정식 결혼절차를 육례라 하며, 중매인 앞에서 결납(結納)에서 거식(擧式)까지의 절차를 치르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황실에서만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혼례를 올린다. 주(周)나라 때는 봉건적 신분사회였으므로 왕, 제후, 사대부 등의 지배계급은 모두 육례의 절차를 따랐다. 이를 무시하면 불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禮)는 서민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며, 서민의 결혼은 통틀어서 ‘야합(野合)’이라고 불려졌다. 따라서 불의가 성립되지 않았다.

즉 다시말해 궁형을 받는 사람은 왕족이나 제후, 사대부 등의 귀족계급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궁형은 남자에게는 말할 필요도 없이 거세를 하였고 여자에게는 형벌로써 평생을 궁정 안에 감금하여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남자와 비교하면 다소 적합하지 않은 느낌이 드는데 그런 때문인지 중국의 학자들 간에도 이설이 있다. 여자의 신체 어느 부위라든가 근육을 베어냈다고 하며, 가슴과 배를 때리거나 또는 기괴한 방법으로 정자(精子)가 들어가는 통로를 막았다고도 한다.

궁형은 5형(五刑) 가운데 사형에 가까운 무거운 형벌에 속한다. 궁형의 발생 시기를 정확하게 단정하기는 어려우며, 아마도 봉건적 신분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잔혹한 5형(五刑) 중에서 사형을 제외한 나머지 사형(四刑)은 자비심이 충만하여 명군이라 칭함을 받던 한(漢)의 문제(文帝) 당시에 폐지된 듯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기》에 삼(三刑)을 폐지하였다는 기록을 놓고 학자간에도 2가지 설이 있는데, 3형은 폐지되었으나 궁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리라는 견해와 결국은 폐지되었으리라는 견해로 양분되어 확실하지는 않다. 문제(文帝)의 뒤를 이은 경제(景帝)는 조칙(詔勅)을 내려 사형을 받게 된 사람도 본인의 희망에 따라 부형(腐刑)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부형이란 궁형의 다른 명칭이다. 이 어원이 만들어진 이유는, 상처가 부패할 때 나는 냄새에서 기인하였다고도 하며, 또는 남자가 거세를 당하여 자손이 끊어진 상태를 이를테면 썩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데 비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등 각기 다른 견해가 있다. 이 부분은 대단히 미묘하여 어느 쪽이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호기(豪氣)로 일관됐던 무제(武帝)는,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일컫는 사마천(司馬遷),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의 명인 이연년(李延年), 어부대사(부재상)을 아버지로 하고 현관(顯官)을 동생으로 두었던 장하(張賀), 드디어는 저 누란의 왕자 등 불세출의 영재나 귀인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차례차례 잠실(蠶室)로 내려보내 환관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한(前漢)이 붕괴된 후 그 뒤를 이어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는 일체의 사형수는 모두 궁형에 처하도록 변화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역대의 황제는 모두 이러한 선례를 따랐으며, 때로는 반역죄나 음모죄에 해당하는 형벌도 궁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궁형은 일단 수(隋)나라에 와서는 표면상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완전히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명대(明代)에 명군으로 이름을 떨쳤던 선종(宣宗)조차도 종종 사대부를 환관으로 만들었으며, 변화된 형태로는 소금을 만드는 인부 40명을 궁형에 처하기도 했다. 어쨌든 당(唐)시대 이후 환관의 공급원은 대체로 변화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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