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증후군
오늘 TV에서 오후에 해줬던 아담 샌들러, 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첫키스만 50번째>를 두번째로 보게 되었다. 다시 봐도 유쾌하고 가슴 따뜻해지는 헐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영화라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고, 남녀 주연배우들의 감칠맛나는 연기력에 영화는 더욱 더 현실성있게 다가왔었다. 아담 샌들러의 진심이 전해졌고, 드류 베리모어의 하루치 인스턴트식 사랑 또한 감동이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중에 영화적인 성취나 재미 이외의 다른 이유가 숨어있음을 나는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여주인공 루시의 병이자 이 영화에 빠져서는 안될 '단기기억상실증'이었다. 단기기억상실이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 컬트적 팬을 양산시켰던 <메멘토> 역시 단기기억상실을 소재로 영화를 풀어나갔었다. <메멘토>역시 관객의 호평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단기기억상실에 걸린 주인공들은 사실 '리셋증후군'을 앓고 있는 현대인을 영화적으로 과장하여 비추주고 있는 인물들과도 같은 것이다. 리셋증후군이란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얼른 리셋(Reset)버튼을 누르면 시스템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핑계로 지금까지 벌여놓은 일이나 인간관계 등을 쉽게 다시 시작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당연히 삶이란 꼬여있기 마련인데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속한 집단이나 일을 새롭게 바꾸는 지금의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성향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아픈 과거는 단기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처럼 깨끗이 '리셋'해버리고 살아가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 영화적 요소들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입학을 하게 되면 으레 자기가 서울 4년제 대학쯤은 갈줄 안다. 그러다 수능을 보고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처음 1학기는 대학생활을 즐기고 싶은 마음에 한번 다녀보기로 한다. 그러나 대학생활을 만끽하는 것과 반비례하게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성적과 폐인생활을 견디다 못해 반수를 결심한다. 학교만 바뀌면 어떻게든 바뀌겠지 하는 마음인거다. 리셋.
우리는 호프집이나 예식장 뷔페 같은 시급많은 알바자리에 혹하여 일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한달쯤 일하다보면 이게 만만찮게 피곤하고 빡세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알바자리라는 것을 알고는 한달만에 알바자리를 그만두고 다른 알바를 알아보게 된다. 세상 사는게 그렇게 호락호락한줄 아나. 리셋.
우리는 회사를 자주 바꾸는게 경력에 도움이 되는 줄 알고 자주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회사보다 저 회사에서 연봉을 높게 쳐주니까 옮기고. 이 회사는 저 회사보다 일이 힘드니까 옮기고. 이 회사에서 부장하고 트러블이 생겼으니까 옮기고. 저 회사의 분위기가 가족 같다던데 하니까 옮기고. 이 회사에서는 도저히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해서 옮기고. 직장에서 은따를 당하는 것 같은데 분위기 좀 바꿔볼까 옮기고. 당신 이상에 정확히 합치하는 회사가 있는지 아무리 옮겨봐라. 되나. 리셋.
우리는 게으름 때문에 일상이 엉망이 되었다는 이유로 군입대를 하기도 하고,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폐인이 되었다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어서 군입대를 하기도 하고, 친구와 크게 싸워 한 도피처로 군입대를 선택하기도 한다. 리셋.
우리는 사이버 상의 일촌 관계에서 신물을 느끼곤 싸이를 탈퇴했다가 재가입하기도 하고, 기분이 안좋다는 이유로 미니홈피의 모든 메뉴를 막아놨다가 열어놓기도 하고,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 스탯을 잘못 배분했다는 이유로 새 캐릭터를 만들어서 다시 키우기도 한다. 리셋.리셋.리셋.
리셋증후군이란 결국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말에 다름아니다. 돌아보니 나를 이지경으로 만들었던 과거 환경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누르게 되는 버튼인 것이다. 새출발하기 위해,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닌 인간관계나 일같은 내 주변을 새롭게 바꿔 새롭게 적응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컴퓨터로 인해 알게된 방법인 '리셋'을 즐겨쓰게 된다. 마치 인간관계나 일 또한 컴퓨터처럼 '쿨'하게 '리셋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리셋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리셋증후군의 성향은 '쿨'한 우리네 세대에게 정확히 합치한다. 새로이 개국한 tvN의 드라마 <하이에나>에서 결혼식 당일 새신랑 김민종의 외도사실을 알게 된 박시연은 새출발하고 싶은 마음에 나이트에서 부킹한 남자와 원나잇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박시연은 '어려운거 아니더라. 원나잇.'이라는 명대사를 김민종의 가슴팍에 꽂아주며 쿨하게 그와의 관계를 리셋해버리려고 한다. 쿨과 리셋.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합이란 말인가.
하지만 리셋은 왕도가 아니다 .또한 우리의 사회 역시 매트릭스 컴퓨터의 세계도 아니다. 컴퓨터 역시 자주 리셋하게 되면 고장나버리고만다. 리셋증후군의 리셋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환경을 제공해줄지는 몰라도 새로운 삶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삶이란건 개개인의 몫에 달려있는 거니깐. 각자의 주변환경을 대하는 태도나 가치관에 더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변의 리셋 버튼 누르기를 멈추어야 한다. 일이 풀리지 않거나 인간관계가 꼬였을때 무책임하게 그것을 방관해버리고 빠져나오는 리셋보다는 내 안을 점검해보고 나를 바꾸는 일에 더 열성을 내야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은 나의 변화를 통해서만 보장받는다. 또한 새로운 삶에서 새로운 환경은 태어나는 법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리셋'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계속 주변의 리셋버튼을 누르는 자는 아마도 죽을때까지 계속 리셋버튼을 누르다 죽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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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증후군같은 뒷북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그 밖의 제레박 칼럼은 페이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