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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erai_작은 꿈

이종대 |2006.10.22 01:33
조회 37 |추천 0


  누군가는 '뽕짝' 같아서 싫다고 하는 '쇼팽' 류를 심히 좋아라 하는 내가, 최근 들어 특히 주구장창 좋아라 듣고 또 심심할 때마다 피아노로 치고 있는 곡이 하나 있으니, (4년만에 바꾼 컬러링 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_-;) 바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다. 우리 말로 바꾸면 "작은 꿈" 정도.

 

  많은 사람들이 뽕짝을 촌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여과 없이 - 너.무.도. - 직설적으로 내뱉곤 하는 '뽕짝'의 속성 때문일 것 같다. 그래서 뽕짝 속에서는 "고요한 내 가슴에 나비처럼 날아오곤 하는" "사랑은 장난이 아니"라는, 그러니 에라 모르겠다 술잔이나 "찬찬찬" 맞대자는 식의 이야기들이 웬만한 경우라면 거의 모두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곤 한다. 쉽고, 흡수도 빠르다. 에둘러 말하는 게 더 세련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뽕짝이 '세련됨'을 어필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곡들 속에 담기는 과장된 '기교' 일 거다. 목소리 끝에 들어가는 '트레몰로' 혹은 '시네루(?)'가 세련됨을 반감시킨다. 물론 이 대목에서 R&B의 시네루와 뽕짝의 시네루가 달라지는 이유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쇼팽의 곡들이나 슈만의 곡들이 드뷔시나 라흐에 비하면 어떤 면에서는 보다 더 직설적이면서도 과장된 기교가 많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뽕짝스럽다고 할 만 하기는 하다.

 

  반면에, 내가 싸이에서 얼마 전에 구매한 슈만의 'Traumerai'는 Jeno Jando라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인데, 그는 특히나 이 곡의 끝자락에서 - 결론을 꽝 내려버리는 듯 내리지르는 - 페르마타 붙어 있는 화음에서 오히려 소리를 줄여버린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여기까지 치는 동안 모아왔던 에너지를 있는 대로 다 모아서 터뜨리곤 했기 때문에, 왜 Jeno Jando라는 사람이 저 대목을 나직하게 처리했는지 매우 의아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저 사람의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죽 늘이면서 속을 타게 하다가 한 차례 격정 속으로 흡입되었다가, 마지막 그 'Fermata' 앞에서 차분하게 곡 전체를 정리하면서 끝을 맺는다. 내 경우에는, 악보를 뒤져 봐도 이 대목은 은근슬쩍 크레센도 받아 오면서 소리를 키우라고 되어 있었기도 했을 뿐더러, 나름대로 이 대목이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난히 힘을 많이 줬던 것 같은데 말이다. 혹시 이 피아니스트의 스타일이 원래 나긋나긋하게 치는 것인지 생각해보기도 했었는데, 다른 곡들을 들어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라는 영화로 좀 더 귀에 친숙해진 구 소련 출신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조차도, 트로이메라이를 칠 때 저 대목에서만큼은 온 힘을 다 해 건반을 강타(?)한다.

 

  웬만해선 다들 쓰곤 하는 '기교'를 부리지 않음으로써 저 피아니스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약간씩의 엇박을 담고 있는 이 곡을 어색하지 않게 잘 살리면서 치려면, 악보에 나와있지도 않은 Ritardando를 남발해서 끈쩍끈적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때문에 이 곡은 어쩌면 '뽕짝스러움'의 최 절정에 있는 피아노 곡들 중 하나인 셈인데, 그런 곡의 최 절정에서 되려 악보에서조차 권장하는 기교를 빼버렸다?

 

  사실 Jeno Jando처럼 여러번 쳐 봤는데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작은 꿈'이 그저 작은 것이 아니라 뭔가 '격정' 속에서 눈덩이처럼 자라나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을 담아내려면 이 사람처럼 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격정을 이겨내고 마지막에 그 꿈이 성취되는 듯한 느낌을 주려면, 역시나 강하게 내리찍어야 한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꿈'이고, 또한 그 꿈이 성취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뽕짝스럽다. 너무도 일반적이고 뻔하니까. 이 곡이 뽕짝이 되지 않으려면, Jeno Jando처럼 마지막에서 억제해야 한다. "어린이 정경"이라는 테마 안에 묶여 있는 이 곡을 제대로 살리려면, 어린 아이의 작은 꿈이 하늘하늘 거리다가 뭉게지고, 그게 다시 아른아른 살아나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 죽기 직전의, 80 다 넘어가던 호로비츠의 연주에서는 곡의 최후를 강렬히 마무리하면서 영광의 신파 스토리를 만들었다면, Jeno Jando는 소박하게 마무리지으면서 진정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별처럼 빛나는 꿈의 꽃밭"을 만들어 냈다.

 

  '경영대생' 타이틀을 단 채로 대략 1년 정도를 지내면서 나는 여기 저기에 흩어진 수많은 상대생들의 입을 통해서 '신파' 스토리를 들어왔다. 기세만으로는 우주를 들었다 놓을 것만 같은 그들의 '자부심', 그리고 그득한 '욕망'을 느끼면서 1년 내내 부대끼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부대낌'의 정체를 나는 '트로이메라이'를 치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작은 꿈'은 2~30대의 '격정'을 거쳐서 4~50대의 '영광'을 향해 달려간다. 그 영광의 정점에서는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어김없이 피아노 건반을 강타하게 된다. 페르마타의 긴 여운 속에 그들의 '한.때.에.만. 작았던 꿈'들은 조금씩 사그러져간다. 곡은 대략 3분 정도로 막을 내리지만, 여운은 여전히 피아노를 휘감고 흐른다. 뚜껑 닫히는 줄도 모르는 채.

 

  '끊임 없이 미끌어지는' 욕망의 사슬에 선을 그으면서, 오늘도 그 대목만은 건반을 '지긋-이' 누르면서 저 곡을 두어 번 쳐 냈다. 피아노에 남는 여운은 짧았지만, 마음속에 맴도는 여운은 짧지 않았다. 어떤 연주가 더 행복할까? 피아노든, 인생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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