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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개처럼 흩뿌려지는 목하고민 중의 포즈... <봉지>

백혁현 |2006.10.22 14:02
조회 97 |추천 0


 

  “열일곱 살, 봉지의 머리에는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녀의 생각, 자신이 젖은 창호지에 뚫린 구멍 같다고 여겼던 상상은 그녀의 이마를 향해 날아오던 자전거 체인을 비키지 못한 순간에 현실이 되어버렸다...”

 

  또 하나의 정형화된 성장 소설... 시골 소읍, 농협에 다니는 아버지와 집안일을 하는 어머니, 그리고 마을에 하나씩 있을법한 망나니 오빠 봉호와 함께 살고 있는 봉희... 누군가의 눈에 띄이지도 않고, 혼자 조용히 사색을 즐기지만 그다지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에게 해꼬지를 하지도 않고(개망나니 오빠 봉호 덕분에 누군가로부터 해꼬지를 당할 염려도 없는)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아이 봉희... 하지만 어느 날 오빠가 속한 배차장파의 전쟁에 휩쓸려 누군가가 휘두른 체인에 머리를 맞아 이마에 (평생을 간직해야 할 정도의) 흉터를 간직하게 된다.

 

  “네가 비닐봉지처럼 날아갔었어. 싸움판으로 뛰어들 때 말이야. 네가 깨지는 걸 보면서, 그래서 내가 그랬지. 어, 저거 찢어졌네.”

 

  이후 봉희는 봉지라는 별명을 얻게 됨과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궤적을 그리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빠 봉희 덕분에 누구도 옆에 접근하지 않았고, 그만큼 존재감 희미했던 봉지의 곁에 몇 명의 친구들이 (미장원집 딸 가현, 정육점집 딸 영주, 제재소집 딸 순미) 모여들고 이들과 함께 봉희 아니 봉지는 자신의 텅 빈 내부를 부여잡고, 상대적으로 꽉 찬 것처럼 보이는 세상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 상상력이 사라진 봉지의 인생에는 더 이상 닫혀있는 안전함이 없었다. 기우뚱하게 열린 채, 그것은 건조했고, 위험했으며, 무료했다... 그날 저녁, 어두워져가는 방 안에서 한 번도 개켜진 적이 없는 요처럼 누워 봉지는 자신이 완전히 텅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봉지라는 자신의 별명은 얼마나 어울리는 것인가. 봉지는 자신 그야말로 텅 빈 ‘봉지’ 같다고 생각했다.”

 

  봉지는 이제 성장을 거듭한다. 오빠가 사고를 치고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봉지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첫사랑이라는 스스로의 추억 만들기에 돌입하여 서울에서 내려온 운동권 학생인 이진영에게 자신의 마음을 허락한다. 그리고 그를 좇아 서울 상경을 위해 공부를 하고, 결국 전문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되며, 서울에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사이 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공부를 잠시 도와주었던 동네 친구 수호에게서 애정 공세를 받기도 하고, 꿈에 그리던 진영과 첫키스를 나누기도 하고, 진영과 수호가 다니는 대학에 수시로 드나들다 프락치로 오인을 받기도 하고, 검거되는 진영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기도 하고, 일찌감치 결혼한 영주의 가출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술집에 진출한 순미가 꿈처럼 그리는 리무진을 상상하기도 하고, 미혼모가 된 가현과 자신의 오빠가 한 집에 살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한다.

 

  “... 수호가 견뎌온 지난 10년은 그다지 격정적이지 않았다. 시대의 격랑보다 항상 한 뼘 낮은 곳에서 그는 흔들렸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까지 한 뼘 낮았던 것은 아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자기 몫으로 가장 거대하다.”

 

  물질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내핍이 (극악스러웠던 시절을 조금 지나) 소란스러웠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 80년대와 90년대, 무브먼트가 정점에 오른 시절을 오롯하게 지켜보았던 작가는 이제 뭔가 다른 소설적 활로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시대적 소명은 사라지고 개인적 명명만이 활개를 치는 시대에 소설은 무엇을 향해 불 밝혀야 하는 것일까, 라는 목하고민의 마천루엔 해답의 외피를 둘러싼 불분명한 시도만이 는개처럼 흩뿌려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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