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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1

백지현 |2006.10.31 23:36
조회 39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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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트레이닝복을 한 벌 샀다. 거의 노랑에 가까운 그린빛이다.

 

퇴근하는 길에 지희랑 종로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일찍 도착한 김에

 

가까운 지하 아케이드를 둘러보다가 그 눈부신 연둣빛을 발견했다.

 

꼭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만 그 연둣빛에 끌리듯 다가가 그것을 만지고야 말았다.

 

분명 눈으로만 보세요. 라고 씌어 있었는데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 내렸던것이다.

 

그것은 무채색 겨울 들판 구석에 혼자 핀

 

아기 민들레의 새싹 같은 빛이었다.

 

더구나 순면 소재의 타월 같은 감촉이 아주 좋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서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고 톡톡 베이비 파우더를 바르면 느껴지는

 

그런 산뜻한 느낌이 그 옷에는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옷집의 금기를 깨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연둣빛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주인이 팔짱을 끼고 다가와

 

만지면 안되는데 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옷 한벌 샀어, 하자 지희는 내가 산 그 트레이닝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야, 이제 홍이한테도 봄날이 오나보다."

 

무슨소리야, 하고 내가 물으니까

 

그녀는 내 진회색 수트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너 이제 이런 상복 좀 벗어 버려."

 

그제야 늘 지희가 나에게 제발 이런 칙칙한 검정색이나 회색

 

혹은 진한 보라색 옷은 입지 말라고 타박을 주던 일이 떠올랐다.

 

"만져 버렸어. 그래서 그냥 산 거야."

 

트레이닝복 한 벌 사는 데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오늘 해물 리소토 먹을래, 하고 서둘러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그 트레이닝복을 꺼내 들었다.

 

기획 회의가 좀 미루어지게 되어서 호수 주변을

 

한바퀴 뛰고 출근을 하려던 것이다.

 

연둣빛 트레이닝복만 입고 나가기에는

 

좀 추울테니까 카키색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

 

검정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뛰면 될 듯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식탁에서 아버지는 뜻밖에도

 

내가 공항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요즘 심혈을 기울여 책을 낸

 

일본의 젊은 작가가 온다는 말을 회의 시간에 들었던 생각이 났다.

 

내가 여름 휴가 대신 겨울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길이라서

 

출판사 사정에 좀 어둡긴 했고, 그건 우리 부서의 일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기획실장인 내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입맛이 없어서 플레인 요구르트에 잘게 자른 키위를

 

집어넣어 먹으려던 참이었다.

 

"글쎄 오늘 통역을 맡은 후나 선생이 쓰러졌단다.

 

  지난번에 보니까 다이어트한다고 밥을 새 모이처럼

 

  조금 먹더니 그게 원인인 것 같아......"

 

전화는 아버지가 받았고 지시도 아버지가 내려야 하는데

 

엄마는 이미 통역자의 병인까지 추리해 내고 있었다.

 

나더러 통역을 하라고? 하는 얼굴로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얇은 햄을 끼운 빵을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내 시선을 피했다.

 

아빠, 나 일본말, 얼마나 하기 싫어하는지 아시잖아요,

 

엄마만 아니었다면, 아침만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난데없이 이노카시라 공원의 벚꽃이

 

일제히 떨어지던 기억이 났다.

 

눈보라처럼, 부드러운 눈보라처럼, 그 부드러움으로

 

길을 잃게 만들었던 베이비 파우더 빛깔의 부드러운 흰빛들.

 

나로서도 난데없는 기억이었다.

 

감기의 첫 징후처럼 코끝이 약간 매웠다.

 

이건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내가 잠시 접시에 든 하얀 플레인 요구르트를 휘저으며

 

아찔해하자 엄마가 또 한마디 거들었다.

 

"거봐, 너도 다이어트한다고 매일 밥도 안 먹고 뛰기만 하니까......

 

  큰일이다."

 

"말하지 않은 지 칠 년이야. 싫어."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만이다."

 

내 말을 자르며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오늘만이라는데, 통역자가 쓰러졌다는데,

 

왜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느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민준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메일로 간단하게 사연을 알리려고

 

내 아이디를 입력했다. 나우 리그렛. 민준이 물었다.

 

"네 아이디 무슨 뜻이야? 지금 후회한다는 의미야?"

 

그런가? 하며 나는 휘파람을 부는 척했다.

 

후회하니? 하고 누가 물을까 봐 겁이 났었나 보다.

 

약속을 다음 날로 연기하자는 메일을 쓰고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지희의 말처럼 옷장 안은 온통 무채색 옷들로 가득했고

 

그 밑바닥에 연둣빛 트레이닝복이 홀로 놓여 있었다.

 

 

 

 

- 공지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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