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를 것 없이 사흘 동안 비 내렸다
빗길 그 사이에 점자처럼 도드라져 있는 파릇한 상처를 밀어 올리며
당신 꽃피었다
숲과 나무가 천천히 스미듯 땅과 비가 천천히 스미듯
젖는 일이란 제 속의 마디를 끊어내는 일이었다
제 속으로 새 마디를 하나 새겨 넣는 일이었다
인간에게는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인간의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 볼 뿐이다.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신경숙
당신이 내게 소리 없이 스미어왔던 것처럼
내게 스미어 내가 모르게 된 것처럼
천천히 스미기 직전의
수만 떨림의 촉수를 뻗었던 누군가가
내 인생에도 있었음을 알겠다
가슴 속 상처가 스민 그 자리에서 길을 더디게 걷는 일처럼
소리도 없이 서로 스미려고
그 얼마나 많은 비 내리고 바람 불었는지
몇 날 비에 젖고 있는 창 밖의 풍경처럼
적조하고 단조로운 음절도 때론 사무친다는 것
어느 사랑이 비의 경전에 귀기울이며 젖는 일에
저토록 몰두할 수 있단 말인가
창 밖의 풍경은 또 훌쩍 키가 자라고
마디진 길을 배회하던 기다림은 더 푸르러지려니
당신을 새겨 넣은 내 푸른 상처는
또 얼마나 오래도록 파닥이며 반짝이겠는가,
빗물 다 스민 자리에서 나무는 또
푸른 물기 스민 잎을 햇빛 속에 가득 새겨 놓는다
강미정 - 상처가 스민다는 것
♬ Y - 코요테
첫 번째 글은 아라베스크님이 남겨주신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