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지난 시간을 잠깐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중학교때 였을 거에요. 한참 다이어리를 꾸미는 게 유행이었죠. (1998년 그쯤 일겁니다) 다이어리 속에 친구들의 편지를 한 장씩 끼워 넣고, 스티커 사진도 엄청 붙여대고, 좋은 글(주로 유행하던 사랑관련 말장난 모음집)들. 그나저나 앞 뒤로 스티커는 왜 그렇게 모아뒀었는지요.
쉽게 버리지 못하고 몇년을 끙끙대며 가지고 있다가 어느날 강림하신 정리신(神) 덕분에 모조리 폐휴지 함으로 가버린 다이어리들. 미처 나의 손이 닿지 못해 서랍 밑바닥에서 몇 년 동안 잠자고 있던 그 때의 다이어리 속지를 한 장 한 장 꺼내어 봅니다. 누구의 다이어리를 뒤져도 거의 비슷한 시의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 때는 서로가 서로의 다이어리를 보면서 좋은 글을 베끼던 시절이니까요.
그런 어디서 들어봤음직한 '좋은' 구절들의 원작을 직접 읽는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 그 다이어리 속의 구절들과는 약간의 세대차이가 났겠지만, 여기저기서 들어봤던 그 "뻔한" 말들. 그 뻔한 듯한 말을 우리는 실제로 잘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는 기분이 어떨까요. 한 번쯤 생각 하겠죠. 다음엔 놓치지 말고 사용해야지.
집 안에 굴러다니던 책의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생각이 들었죠. 제목조차도 어디서 따온 듯한 뻔한 제목. 그 뻔한 제목이 "뻔한" 열풍을 불러일으킨 그 책이라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말이지요.
카타야마 쿄이치가 쓴 .
만만찮은 두께에 비해서는 생각보다 참 빨리 읽었습니다. 반전이라고는 없는,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그 순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구성이었거든요. 한 남녀가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가냘프고, 큰 눈이 인상적인 예쁜 여자입니다. 가냘픈 데에서 문제가 시작되지요.
여자는 기어이 백혈병을 앓고, 아픈 모습을 남자는 그대로 지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행을 가 불사의 약을 가지고 돌아와 여자는 살아나고 둘이 결혼하여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면 참 좋겠지만, 소설은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이야기와는 다르지요. 무리하게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려고 하다가 다시 돌아와 여자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거기에서 이야기가 끝나면 누가봐도 사랑은 '부질없고 비극적인' 게 되어버립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 끝나면, 남은 사람은 어떡합니까. 동반자살이라도 하는게 사랑을 이루는 비극적인 열쇠일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의 마력은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철저한 고찰이 시작되는 것이죠.
실체는 "죽음" 이라는 것에 사라졌어도, 숨쉬는 이 순간 사랑하는 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그리고 떠나버린 사랑이 새로 시작할 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된다면. 그게 세상 사람들에 의해 어떤 평가를 받든, 그 사랑은 그걸로 되었고, 그렇게 박제가 되어 가슴속에 영원하게 되지요. 그 둘만의 로맨스로 그렇게 끝이 납니다. 저의 역할을 살짝 이미지만 제공하는 것이니, 남은 부분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망가져 버린 관계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뒤돌아 서지요.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인연이 아니었어." 모두 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관계입니다. 누가 만든게 아니지요. 내가 만들고, 내가 키워나가다가 어느 쪽 이었든 제 풀에 지쳐 관계를 그만두어 버리고 해 버리는 자기 합리화일 뿐 입니다.
물론, 나는 그 인연이 너무 좋아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좋은대로 이용한 다음에 버리는 사람도 많지요. 그것도 인연입니다. 다른 말로 "악연" 이라고 하지요. 그런관계까지 예쁘게 가꿔나가라는 말은 감히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저도 아직 사람이라서요 ㅎ
한참 모 교수때문에 바른글씨로 하루에 몇 시간씩 수필을 쓰던 생각이 납니다. 수필을 검사 받으러 가기 전에 친구들끼리 돌려 읽습니다. 욕은 검사 받으면서 교수님에게 충분히 먹을테니, 우리는 그냥 내용이 내 가슴에 품습니다. 그 수필 속에 알게모르게 친구, 부모님, 혹은 어떤 '사람' 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있는 경우가 참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땐 왜 그러지 못했을까, 다시 만나면 다시 한 번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미친듯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 곁에 왔다가 상처입고 나도 모르게 떠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사람의 손을 한번이라도 잡아주었었는지.
-사실 나도 그 마음이었다. 표현하지 못할 뿐이었다.
악연도 악연이지만, 사실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하는 좋은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이 들지요. 그 사람들을 미처 만나지 못하고 악연에 허우적 대며 울다가 개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인연을 지나쳐 버리기도 하고,
어쩌다 겨우 만난 소중한 사람을 우리들은 이 넓은 세계에서 쉽게 놓칩니다. 그리고 대부분, 뒤늦게 후회하고 맙니다.
자존심 때문에 소설속에 수없이 떠돌아 다니는 예쁜 말도 사용하지 못한 채 일생을 보내버리는 경우도 많지요. 물론 저도 이 순간, 진지하게 제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결국 삶이란 혼자 살아간다 하더라도 혼자 인내해 온 그 아름다움끼리 만나 남은 삶을 의미있게 재구성 하는 건 아닐런지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 셋이라 지금은 이렇게까지만 생각을 해 보렵니다.
인연의 개미가 엉금엉금 늪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인연을 낚아보려고 온 사람은 총대를 둘러메고 늪을 헤매입니다. 사실, 인연은 '늪'에 있지 않습니다. 총대를 둘러 멘 사람들의 발자국 사이사이에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씨앗을 세상에 뿌리러 나가고 있는 중이었지요. 우리가 인연을 낚으러 가는 사이, 인연은 개미의 모습을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인연이 화려한 모습을 하고 그 자리에 있을거라고 가끔 착각합니다. 어쩌면, 누구나 알지만 모르는 척 하는 수수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여러분도 저의 소중한 인연입니다.
저도 개미의 모습으로 오늘도 인연의 씨를 뿌리러 살짝 나가보렵니다. 수많은 사람들도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을 가꾸고 있는 중이겠지요.
그다지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러브액츄얼리" 가 그다지 현실성 없는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늘이 점지해 준 인연이 아닌,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의 의지로 새롭게 만들어 나간 인연이 아니던가요. 모든 인연의 모습은 어쩌면, 용기라는 샘물을 먹고, 마음의 눈을 키웠을 때에만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참, 이런 말이 있지요.
"내가 너 보다 생일이 일주일 빠르네?"
"응, 그러네."
"난 참 행복한 사람이야."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난,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살았던 적이 없거든."
이 말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역시나 이 책에 있더군요. 내 얘기도 아닌데 혼자 가슴뭉클해 하고 그랬더랬습니다.
날씨가 참 더워요. 새벽 6시에는 선선했는데 6시 반 부터 매미가 울어대고 있습니다. 일곱시에는 해가 이글이글~~ 집 창문이 동서향으로 나있어서 아침에는 작은 방으로, 저녁에는 거실로 피서를 오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여름 반납하신 분들, 힘 내시고요! 여름을 즐기시는 분들도, 즐겁게 하루하루 보내시고요. 버릴 건 버리고, 잡을 건 꼭 잡으세요.
인연은 지금, 달팽이의 모습으로 일부러 느릿느릿 내 옆을 지나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도 예쁜
하시고요.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래요.
다음에 좋은 이야기로 다시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