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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같은 사랑.. 고은님

김종찬 |2006.11.14 10:32
조회 29 |추천 0

그림처럼 화창한 오후,
나는 날씨에 감격해하면서 젊은과 문화와 그럴듯한 자유가 뒤섞인 혜화동의 한 노천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고 있다. 마주 앉은 친구는, 뒤통수만 보이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건 햇빛을 받아 빛나는 내표정. 그래서 마침 지나가던 tv의 한 취재 패거리의 눈에 띈다. 카메라맨이 내 앞으로 와서 예쁘게 앵글을 잡으면,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묻는다. 억양은 다소 상기되어 있다.
"어떤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세요?"
"완전한 사랑이요?"
나는 되묻지만, 난처해하거나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러나 거만하지는 않은 말투로 되묻는다.
"네 그러니까 어떤 사랑을 하고 싶으세요?
미처 나의 속뜻을 간파하지 못한 단순한 리포터가 설명이랍시고, 해준다.
"음, 글쎄요... '날씨같은 사랑이요?'
말끝을 조금 올리는 건, 약간의 겸손함을 보이기 위한 트릭이다.
"날씨 같은 사랑이요?"
리포터도 역시 되묻는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모르기 때문에 되묻는다.
"날씨만큼 늘 새롭고, 그러면서 또 한결같은 것도 없는 것 같아요."

날씨같은 사랑
"전 벌써 27년째 초여름을 맞고 있지만, 제 기억으론 2번의 여름 모두 달랐어요.
그렇다고 뭐 그렇게 , 뾰족하게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거든요? 매해 봄도, 가을도 그리고 겨울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지금껏 27번의 봄과 여름, 27번의 가을 겨울을 보냈죠. 계절만이 아니에요. 하루만 해도, 매일매일의 날씨는 늘 새롭죠. 그렇다고 오늘 해는 파랗고 내일 노란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데 말예요.
하루에도 서늘한 아침부터 찌는 듯한 한낮 그리고 저녁엔 다시 약간 끈적거리는 바람이 불어요. 정말, 신기해요."

이쯤이면, 취재 패거리들은 물론이고 tv를 시청하는 사람들도 모두, 나를 주목할것이다. "비는 일주일에도 서너 차례씩 내리지만 폭염 속에 갑자기 뒤통수를 치듯 쏟아지는 소나기는, 벌서 수백 번 당한 일인데 언제나 놀라요. 그리고 감정이 변하죠. 날씨에 따라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리기도 하고, 또 우산 색깔을 바꾸기도 하죠. 가끔 심한 날에는 3년 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아무 이유없이 결별을 선언한 적도 있어요."

"그랬어요? 날씨 때문에요?"
리포터가 또 되묻는다. 그녀는 정말 모르기 때문에 묻는다.
"네. 그것도 전화루요. 그리곤, 아니, 그러고도 후회하질 않았어요."
나는 조금 웃는다.
"그날그날의 날씨만큼 새롭고, 또 강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사랑이 그날그날의 날씨만 같다면, 100년을 마주 보고 있는대도 싫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권태니 싫증이니 하는 건, 있을 수 없죠." 나는, '없겠죠' 가 아니라 '없죠' 라고 말한다. 거만하게도.

그러나 모두들 이제쯤이면,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의 사랑은 그렇지 못하겠죠?"
리포터는 무려 서운하다는 듯한 말투다.
"그래요, 아쉽게도. 실제 사랑은.. 음.. 마치 갓 구워낸 빵 같아요. "
"갓 구워낸 빵이라구요?"
리포터는 스타카토로 또 되묻는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자꾸 묻는다. 취재 패거리는 이제 내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듯 보인다. 마치, 사랑에 관하여 날 취재 나온 것 같다.

갓 구워낸 빵 같은 사랑

"갓 구워낸 빵.. 일테면 이만한 식빵 같은 거요."
나는 두 손을 들어 적당한 크기의 둥근 식빵 한 덩이를 그려 보인다.
'아, 네..."
리포터도 날 따라 두손을 들어 둥근 식빵 한 덩이를 그려 보인다. 그려 보이려고 하지만 영 안 된募?듯이 미간을 조금 찌푸린다. 그녀는, 용한 점쟁이라도 찾아온 심약한 노처녀 같다.

"갓 구워낸 빵.. 겉은 노릇노릇하고 딱 적당하게 바삭바삭한 빵이어야 해요. 그러면서도 속살은 너무나 보드랍고, 따뜻하고, 담백하고, 감 칠맛이 나죠. 그런빵.. 너무나 먹음직스러워서 식탐있는 아이처럼 빵을 뜯어먹기 시작해요.
그 순간부터는 빵의 모습은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물론, 조금씩 맛도 변질되죠. 처음, 빵 한 조각을 뜯어 혀끝에 녹여 삼키던 그 맛보다 더 훌륭한 맛은, 빵을 다 먹어치우도록 다시는 맛 볼 수 없죠. 어쨋거나, 주어진 빵을 다 먹어버리고 나면 남는 건, 바싹 말라 버린 빵 부스러기뿐이죠. 사랑은.. 그렇게 변질되고 변형되면서 결국엔 처음 갓 구워져 나왔을 때의 빵을 추억할 수 있는 약간의 여력만 남는 거.. 아닌가요?"

리포터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푹 내쉰다.
카메라맨과 pd는, 카메라를 삼발이 위에 고정시켜 놓고 리포터 옆에 와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시청자들 역시 몇 조각 남은 사랑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입에 넣으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은 빵 쪼가리조차 까끌까끌하게 말라비틀어져 입천장을 긁을 정도가 되면, 남은 일은 과감하게 그걸 갖다 버리는 것 뿐이에요. 행여라도, 마치 무슨 열렬한 낭만파 시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썩어버린 빵을 먹었다가는 탈이 날 대로 나서 앞으로 빵이라면 쳐다 보기도 싫을 만큼 넌더리를 내게 되거나, 혹은 빵이란건 본래부터 그렇게 썩어 빠진 거라고 위험한 단정을 짓게 될 수도 있어요. 심한면."

........
"그럼, 태양 같은 사랑은 어때요?" 잠자코 듣기만 하던 pd가 불쑥 묻는다.
........

태양 같은 사랑

어떤게 태양 같은 사랑일까- 나는 잠시 생각해 본다.
하긴, 나도 쾌 오랫동안 태양 같은 사랑을 꿈꿨었다. 정열적인, 앞뒤 없이 무작정 내닫는, 짐을 잔뜻 싣고 내리막길을 굴러가는 손수레처럼. 그러나 그 그 끝은, 전신주든 담벼락이든 부딪쳐서 산산조각나는 거 아닌가요? 누군가 그런다.
사람들이 '후후-'하고 약간씩 웃는다.
"태양은 늘 뜨겁고, 이글거리고.. 그래서 결국엔 뜨거운 줄도 모르게 될걸요."

이를테면..그래, 이를테면 어떤 것이 태양 같은 사랑일까.

열흘을 무턱대고 기다려 다시 맞닥뜨리고, 그리고 그릭골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아니, 알고 싶은 생각 조차 없이 끌어안고 섹스를 나누면, 그런 것이 태양 같은 사랑일까.

내 생각은, 조금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래. 그것 참, 한편으론 부러운 사랑이구나. 나는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그 다음이 영 잡히질 않아요. 이후 그둘은.. 어떻게 살아야. 그 태양 같은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제야 뒤늦게 상대에게 단답식 질문을 던지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해야 할까요? 이름은 뭡니까. 좋아하는 색깔은 뭐죠?

나는 묻기 시작한다.
"태양이 늘 뜨겁고 눈부셔서.. 오늘 해 도 어제 해도 10년전 해나 10년, 100년후의 해도 늘 그렇게 뜨겁기만 해서.. 그래서 사막에는 꽃도 없고, 물도 없는 건가요..?
나는 말하면서 내게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남는 건, '이스트 팩' 배낭뿐이겠군요. "
나는 묻다가 지쳐 웃고 싶어져서 농담을 해버린다.
와아- 이번엔 다들 유쾌하게 웃는다.
"그럼 어쩌죠? 당신이 말하는 '날씨 같은 사랑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빵같은 사랑' 도 '태양같은 사랑' 도 남는 건 건조한 빵 부스러기나 모래밭 뿐이라면, 우린 도대체 사랑을 할 수 없는 건가요?"
아아뇨. 내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되찾으면서 크게 설레질을 한다.
아아, 사랑이라...

달 같은 사랑
"달 같은 사랑이 있잖아요."
정말로 근심스럽게 묻던 리포터의 얼굴이 다시 환해진다. 사랑에 집착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 달은, 날씨만큼 늘 새롭지도 않고 태양만큼 한결같지도 않죠. 오늘 저녁 달이나 어제저녁 달이나 올해 보름에는 보는 달이나 작년 보름에 봤던 달이나 어제저녁 달이나 올해 보름에 보는 달이나 별반 다를게 없어요. 하지만 늘 그러려니- 하고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무심코 올려다 보면, 달은 아주 달려져 있거든요?"
"그래요..오오, 정말 그러네요?"
"사람들 모르게 꽃이 피었다 졌다.. 그러는 것처럼요."
누군지 모르게 사람들이 서로 맞장구를 친다. 모두들, 사랑의 희망이랄까 가능성을 찾았다는 표정이다. "적어도 한 달 간격으로, 달은 찼다가 기울죠.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달라지면서. 손톱 끝만하게 기울어서 아, 이제 앞으로 달을 보기는 영영 틀린게 아닌가- 싶으면, 어느새 보름달이 돼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제야 달의 존재를 새삼 확인 하고, 갑작스레 고마워도 하죠. 그리곤 안심하면서 다시 잊기 시작하구요."

"빵보다 낫군 그래. 당최 없어지질 않으니."
담배를 많이 피운 듯한 어느 중년 사내가 거칠게 한마디 한다. 그리곤 지금껏 시원찮은 사랑타령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킨 것이 못내 창피한지 가래침을 카-악 하고 끌어 올려 탁 내뱉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좋다.

tv 촬영 일패들이 고맙다는,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내게 하고 자리를 뜬다.
시청자들도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린다. 나와 내 친구주변엔 사람들이 제각각 목적을 가지고 다시 오가기 시작한지 오래다.

나는 얼음이 녹아버려 싱거워진 음료를, 빨대를 빼고 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신다.
친구가, 여전히 뒷모습만 보여서 누군지 알 수 없는 내친구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면서 말한다. '가자, 영화 시작하겠다' 그래-' 나는 옆에 놓아둔 가방을 챙겨 든다. 하지만 그래도 친구가 여잔지 남잔지 모르겠다. 어떻든 함께 영화를 보러 간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빛나던 해가 구름에 가려 조금 어둑해진다. 이래서 나는, 날씨가 좋다.

*고은님 단편1. (출저: 고은님 에세이) http://cafe.daum.net/kon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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