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는 19일 새벽 프랑스 파리에서 치러진 2006-200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4차 대회에서 총점 184.54점으로 정상에 올랐다. 성인무대 2번째 도전만의 위업이다. 지난 5일 캐나다 빅토리아 세이브 온 푸즈 메모리얼 센터에서 열린 ‘2006 ISU 시니어그랑프리’ 2차대회 싱글 자유 종목에서 김연아는 성인무대 첫 번째 에 나섰다. 주니어무대 정상에 오른 기세로 밀어붙인 4일 규정종목인 쇼트 프로그램 종목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5일 열린 프리스타일 점수와 합산한 결과는 아쉽게도 3위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선수가 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에 출전해 동메달을 딴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으니 사실상 그 자체도 한국 피겨 스케이팅 100년사의 쾌거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2주만에 이번에는 당당하게 1위에 오른 것이다.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 우승자인 일본의 안도 미키와 2차 대회 우승자인 캐나다의 조아니 로세트(151.52점)를 모두 제치고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8개월전에도, 2주전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겁 없이 한국 피겨스케이팅 100년사를 갈아치운 것이다. 말 그대로 국내 피겨 역사의 '기록 제조기'라고 불릴 만하다. 지금까지 국내 선수가 세계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낸 것은 김연아가 유일하다.
특히 지난 시즌 주니어 무대에서 금메달을 따낼 때도, 지난 5일 시니어 데뷔 무대였던 2차 그랑프리에서 동메달을 따내면서도 그녀는 전문가들의 예측을 계속 피해갔다. 발목이 약하고 체력이 딸리기 때문에 규정종목에서는 강하지만 자유종목에서 순위권을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지난 2차대회가 잠시 귀국했던 것도 발목부상으로 알려졌으며, 본인 스스로도 그 때문에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단 2주 만에 이번에는 시니어 그랑프리 정상에 오른 것이다.
현재와 같은 열악한 국내 피겨 환경에서는 지금까지만의 기록으로도 그녀는 절대 깨지기 힘든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날 김연아의 총점은 올 시즌 치러진 4차례 그랑프리에서 안도 미키(192.59점)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점수여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를 수 있는 실력으로 자라났음을 스스로 입증해 냈다. 지난 2차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고, 이번 4차대회에서 1위에 오르면서 단 6명에게만 출전 기회가 주어지는 올 시즌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12월.러시아) 출전 가능성을 높였으니 바야흐로 여제등극도 멀지 않은 느낌이다.
김연아의 '스타탄생'은 선수 본인의 치열한 노력과 함께 어머니 박미희씨의 지극한 보살핌의 산물이었다. 물론 코치진의 조언, 대한빙상경기연맹의 뒷바라지까지 4박자가 제대로 어우러져 나온 결과물이었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7살 때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김연아는 이내 '피겨신동'으로 불리며 중.고교 선배들을 제치고 국내대회 우승을 독차지한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피겨 선수로는 타고난 161㎝의 키에 40㎏의 신체조건에 높은 점프력이 탁월한 김연아는 이미 국내 무대에서는 경쟁자가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세계무대에 뛰어들면서 빙상연맹의 체계적인 지원이 가미됐다. 수백명을 체계적으로 키워 세계 피겨계를 장악해가고 있는 일본에 단기필마로 달려든 형국이었지만, 일본의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과 주니어 무대에서 '2인 경쟁 체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4년 세계 주니어그랑프리 파이널 준우승을 시작으로 2005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준우승과 주니어그랑프리 우승을 이끌어낸 김연아는 지난 3월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마침내 주니어 무대를 평정하고 단기필마의 도전을 시니어 무대로 연장시킨 것이다.
이후 시니어 무대 도전에 나선 김연아는 전략을 부분 수정한다. 시니어 무대에서도 일본의 강세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을 넘어서도 미국, 캐나다 등의 전통적 강호가 즐비한 밀림이었기 때문에 변신이 필요했고 소녀와 다른 여인의 성숙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규정종목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자신의 잇점을 바탕으로 다소 약한 자유종목에 변화를 주는 기술적인 보완도 물론 고려했을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주니어 무대에서는 영화음악 'Papa, Can you hear Me'의 느리고 서정적인 음악에 맞춰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펼쳤던 김연아가 시니어 무대 데뷔를 앞두고 성숙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새로운 안무와 음악이었다. 빙상연맹의 훈련지원금을 바탕으로 지난 5월부터 3개월 동안 캐나다에서 세계적인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의 지도를 받고 한 단계 올라선 프리 스케이팅 프로그램을 연마하고 돌아왔다. 이러한 작전은 주효했으며, 미리 준비한 만큼의 효과도 있었다. 지난 2차 대회에서 새로 연습한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으로 연기에 나섰지만 긴장과 체력 부족으로 아쉽게 동메달에 머무른다. 하지만 성인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김연아는 이번 4차 대회에서 고난도 기술을 연기 전면에 배치하는 '변칙작전'을 통해 최고점수를 받았다. 규정종목에서의 강점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자유종목의 단점을 보완하고 나니 무적일 수밖에... 한 차례 넘어지긴 했지만 기술요소 점수와 프로그램 구성 점수에서 최고점을 받아 염원하던 시니어 무대 왕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나홀로' 뛰어난 업적을 일구고 있는 김연아. 그녀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악한 국내 연습 환경과 비인기 종목이라는 굴레 속에 금전적인 도움을 줄 스폰서 업체가 없어 해외 전지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은 그녀의 고속 성장, 뿐만 아니라 한국 피겨계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가능성을 그녀는 보여주었다. 언제나 비인기종목의 성장은 한 사람의 초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양궁이 김진호라는 걸출한 선수가 등장한 뒤로, 여자골프 역시 박세리라는 걸출한 스타의 탄생을 계기로 세계 무대를 장악했다. IMF로 위축돼있던 사람들에게 기운을 차리게 해준 하얀 발목의 박세리... 79년, 83년 세계 양궁 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에 오른 그녀 단 한명을 저지하기 위해 세계대회를 비롯한 경기 전체의 룰을 그랜드 피타 방식으로 바꾸게 한 김진호... 그들 역시 사회적 지원을 받아서 세계 정상에 이른 것이 아니라 나홀로 세계 정상에 오르고 역으로 한국 스포츠계의 위상을 올려주었듯 김연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세 선수에게는 개인적인 열정과 치맛바람(바짓바람)으로 대표되는 가족의 헌신적인 지원이 세계정상이 되는 원동력의 전부였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세계정상이 가능했던 것은 단기필마로도 인해전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스포츠만의 특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단기필마의 성공 후에 붐이라는 일종의 쓰나미가 밀려오면 해당종목은 비인기 종목에서 인기종목화되고 사회적 지원도 뒤따르게 된다는 교훈을 공통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피겨연맹이 이제부터 할 일은 바로 그 우연히 찾아온 쓰나미를 타고 넘는 탁월한 경영능력일 것이다. 이제 김연아의 성공을 세계화로 연결시킬 수 있는 탁월한 경영마인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쓰나미는 진짜 쓰나미처럼 공황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