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독백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막 3장
Past
시은이는 계절마다 취급하는 품목을 바꿨다. 봄에는 꽃, 여름에는 모자, 가을에는 액세서리, 겨울에는 오징어와 군밤을 팔았다.
장사는 잘 되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매월 자릿세를 냈지만 시은이는 예외였다. 자릿세는 동건이나 점박이가 아닌 다른 청년들이 받으러 다녔으나 한번도 시은이에게 자릿세를 요구하지 않았다.
동건은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시은이에게 들렀다. 어떤 날은 장사하는 것을 도와 주기도 했고, 어떤 날은 술에 취해 가지고 와서는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주섬주섬 늘어놓기도 했고, 어떤 날은 먹을 것을 안겨 주고 가지도 했다. 그러나 무슨 일로 찾아왔든지 간에 동건이 돌아갈 때 하는 말은 늘 똑같았다.
"시은아, 힘들더라도 열심히 살자, 언젠가는 쨍하고 해뜰 날 있을 거야!"
동건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은이는 남 몰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상실 주인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꿈이 아니라 한인지도 몰랐다. 취직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깨어지면서 가슴에 맺힌‥‥‥.
시은이는 종로 5가에서 노점상을 시작하면서 옆에서 장사를 하는 고흥댁의 소개로 계에 들었다. 계주는 전에 을지로 5가에서 커다란 한약방을 하다가 몇 해 전에 한방병원을 지어서 강남으로 이사갔다는 한의사 부인이었다.
계가 깨져 곗돈을 떼이는 것은 아닐까 가슴 조이면서도 시은이는 꼬박꼬박 곗돈을 부었다. 곗돈을 타면 작은 가게라도 얻어서 의상실을 차리겠다는 꿈에 부풀어서.
3년 동안이나 조심스레 가꿔 온 시은이의 꿈은 어느 날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시은이에게 꿈을 심어 준 사람이 동건이였다면 그 꿈을 깬 사람 역시 동건이였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거리에는 캐럴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면서 가로등이 눈을 뜨고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을 앞둔 비교적 한가한 시간이었다.
시은이가 연탄불에 군밤을 굽고 있는데 동건이 굳은 얼굴로 찾아왔다. 우연인지 계획적이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날은 시은이가 곗돈을 탄 날이었다.
"오빠! 군밤 좀 드릴까요? 햇밤이라서 아주 맛있어요."
시은이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말을 붙였다.
"됐어."
동건은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전에 없이 무거웠고, 술도 마시지 않은 것 같은데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시은이가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없어."
동건은 굳은 얼굴로 간단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분위기가 평상시와는 많이 달랐다. 무슨 일이 생긴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굳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여서 시은이도 더 아상 묻지 않았다. 계속 군밤을 구었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시은아, 돈 좀 빌려 줄래?"
동건이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얼마나요?"
시은이가 묻자 동건은 천천히 담뱃갑을 꺼냈다.
갑째 쥐고 손목은 흔들어 허공으로 담배 한 개비를 띄워 올렸고 입으로 척 물었다. 가죽 점퍼에서 지퍼 라이터를 꺼내 오른손으로 불을 붙였다.
묵묵히 담배를 반 개피쯤 피우고 나서 동건이 짧게 액수를 불렀다. 우연인지 계획적이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동건이 요구한 액수는 정확히 시은이가 3년 동안 부어서 탄 곗돈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짐짓 놀란 체하며 그런 큰돈이 어디 있느냐고 펄쩍 뛰었을 상황이었다. 시은이도 어쩌면 그랬어야 옳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시은이는 그러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잠시 생각하다가 딱 한 마디 물었다.
"언제 갚으실 수 있는데요?"
"석 달만 쓸게."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 동건은 곧바로 대답했다.
시은이가 잠시 갈등하는 사이에 동건은 담배연기를 한 모금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뿜으며 덧붙였다.
"휴우. 돌아와서 꼭 갚으마."
"이자는 안 주셔도 돼요. 그 대신‥‥‥ 삼 개월 뒤에 원금은 꼭 갚아주세요."
시은이는 비닐봉지 사이에 감춰 두었던 핸드백에서 통장을 꺼냈고, 전대에서 도장을 꺼냈다. 동건에게 통장과 도장을 내미는 시은이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고맙다!"
동건은 사뭇 감격스러웠는지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코에 대고 쓰윽 비비면서 흘러내리는 콧물을 다시금 들이켰다.
"비밀번호는?"
"일.이.공.팔.이요."
12월 8일은 정우의 생일이었다. 시은이는 모든 비밀번호를 1208로 사용하고 있었다.
"일이공팔?"
동건이 확인하듯이 물었고 시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 달 뒤에 보자!"
동건은 손을 흔들며 떠났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동건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났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동건의 친구들과 동생들은 여전히 종로 거리를 활보하며 다녔다.
시은이는 가끔씩 그들에게 동건에 대한 소식을 물었다. 어떤 친구는 일본에 있을 거라고 했고, 어떤 친구는 파라과이에 갔을 거라고 했고, 어떤 친구는 감방에 있을 거라고 했다.
"한꺼번에‥‥‥ 자릿세를 낸 거야."
시은이는 동건에게 빌려 준 돈을 체념하기 위함인지 수시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밥을 먹다가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시은이는 혼잣말을 했다. 정우는 느닷없이 들려 오는 시은이의 중얼거림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시은이의 혼잣말은 반 년 가까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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