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밀러 속의 영상
─정 겸
낡은 승용차 한 대
오르막 산길에 버려져 있다
깊이 패인 헛바퀴자국에서
산길을 오르고 싶은 필사의 흔적을 알 수 있다
번호판은 탈색되어 앞 범퍼에 힘겹게 매달려 있고
투명했던 앞 유리는 병든 폐부처럼 뚫려 있다.
바람이 빠져나간 네 바퀴의 홈에는
거친 황토와 모래알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운전자가 없는 운전석
하이웨이 주유소 상표가 부착된
크리넷스티슈 박스가 구겨져 있다
조수석, 손 달력에는
반라의 여인이 말 잔등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처럼 소주병을 높이 치켜들며 찡긋 웃고 있다
달리는 동안 운전자는
저 여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아 왔을까
깨진 차 유리문으로 차안에 갇혀 있던
욕망의 잔재들이 영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실명한 양쪽 헤드라이트 앞으로
어둠이 눈치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선으로 깨어진 백미러를 본다
황토 빛 빗살무늬토기 한 점 클로즈업 되고 있다
* 감상
이 시를 읽으면서 이란 내 시가 생각나는 까닭은? 그 차는 나와 13년간을 동거동락 하던 나의 분신과 같은 차였는데, 그 차를 폐차시키면서 나는 나의 갈빗대 하나가 빠져나감을 느꼈었다. 아담의 갈비뼈,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갈 때의 그 기분을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정겸 시인의 이 시는 오르막 길, 산길에 버려진 낡은 승용차 한대에 대한 풍경 묘사다. 그 차는 주인에게서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장례식(폐차)도 안 치루어 주는 아주 나쁜 주인을 만나 산길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그 차. 그래도 산길을 오르려고 헛바퀴자국을 깊게 패이게 하느라 필사의 흔적도 보이고. 번호판은 범퍼에 힘겹게 매달려 있으며, 앞 유리는 병든 폐부처럼 뚫려 있고, 바퀴는 바람이 빠져나간 상태.
한 때, 이 차를 애용하였던 주인은 손달력에 요염한 포즈로 있는 반라의 여인으로부터 많은 유혹도 받았으리라. 그 유혹의 연장인 욕망의 잔재(생의 원동력)들도 영혼처럼 빠져나가고 있으며, 이제 실명한 양쪽 헤드라이트 앞으로 어둠(죽음의 다른 표현)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그러나 시인은 깨어진 백미러를 통해서 황토 빛 빛살무늬토기(참 난해하지만 ‘아름다운 시절’, ‘원초적인 생의 시절’이라 하고 싶다, 아니면 사선으로 깨어진 백미러에서 연상된 걸까?)가 한 점 클로즈업 되는데……
시인은 버려진 차에 대한 묘사를 하면서 자신의 현 상태를 대비시켜보는 동시에 그 옛날 아름다운 시절을 상기시켜보려는 건 아닌지…… (강성철)
백미러 속의 영상> 읽기, (시사사 2004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