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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바/라/기 6막 4장

박대용 |2006.12.25 21:43
조회 66 |추천 0

사라지는 것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막 4장

                                                                                 Past 

 

 

 

 

  정우가 유리를 만난 것은 대학교 삼 학년이 되던 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엉어영문학과 신입생이 입학을 하였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햇병아리였는데 시골 캠퍼스 대학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회지풍의 세련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유리의 출현으로 인해 잔잔하던 대학이 아연 활기에 넘쳤다. 그녀 주변에는 이성에 갓 눈을 뜬 후배들이나 여자친구 없는 친구들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촐랑거리며 맹돌았다.

  다른 학과 후배나 친구들은 말을 붙이지 못해 안달했으나 정우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캠퍼스에서 마주쳐도 유리가 먼저 인사를 해 오면 묵례만 할 뿐 먼저 인사를 해 본 적조차 없었다. 뭔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녀에게서 이질감을 느낀 때문이었다.

  유리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새 학기가 지나고 보름쯤 지나서였다. 수업이 없을 때면 대학교 뒷산에서 원서로 된 서모셋 모음의 소설을 읽곤 했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면 유리가 강의실 창가에 서서 하늘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강의실 복도에 나가서 담배를 피울 때는 자주 누군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유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보름이 지나자 유리에 대한 후배나 친구들의 관심도 한결 가라앉았다. 정우는 그제서야 유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참외 만한 자그만한 얼굴, 쌍꺼풀이 없는 시원시원하게 큰 눈, 오똑한 콧날, 선이 뚜렷한 붉은 입술, 날렵한 몸매‥‥‥ 어딘지 모르게 첫사랑이었던 지현과 많이 닮아 있었다.

  정우는 가끔씩 먼 발치에서 그녀를 훔쳐보았다. 어떤 때는 허공에서 그녀와 시선이 얽히기도 했다.

  처음에는 눈이 마주치면 몹시 당황해서 재빨리 시선을 돌렸는데 어느 날부터는 정반대로 변했다. 눈이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고 큰눈을 깜빡이며 무안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마치 '당신은 내 남자예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정우는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을 느꼈다. 세상 어느 자리에 갖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자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사월이 되자 알 수 없는 갈증이 찾아왔다. 캠퍼스에서 유리를 바라보고 있어도 갈증이 났고, 수업 중에도 갈증이 나서 제대로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소설을 읽어도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정우는 봄꽃이 지기 전에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휘어잡을 수 있는 짧고도 강렬한 말로‥‥‥.

  기회가 찾아온 것은 현충사로 봄 간담회 가서였다. 남자 들끼리 어울려 술판을 벌이고 있는데 그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같은 영문학과 후배가 복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후배들은 취할 대로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정우는 재빨리 그녀를 따라나섰고, 술을 몇 잔 마신 상태였지만 후배와 그녀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갔다.

  검사를 받아 보니 급성 맹장이었다. 후배의 집으로 전화를 하자 어머니와 이모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맹장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이유가 없어 병원을 나서니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현충사로 돌아가도 모두들 가고 없을 시간이었다.

  "유리는 집이 어디니?"

  정우가 유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천안 시내예요."

  "아, 잘 됐네. 나도 시내에 들를 일이 있는데 내 차를 타고 가자."

  "고맙습니다."

  유리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정우는 달리면서 차창을 살짝 내렸다. 향긋한 봄바람이 열려진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병원에 있을 때는 취중이라서 몰랐는데 술이 깨고 나니 그녀만의 내음을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내음은 지현에게서 맡던 것과는 또 달랐다. 마치 7월에 청포도 과수원에서 풍겨 오는 달콤한 향내 같았다.

  "노을‥‥‥ 좋아하니?"

  정우는 그녀의 냄새를 기억해 두기 위해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며 물었다.

  "네?"

  그녀가 제대로 못 들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노을이 멋있게 지는 곳을 알고 있거든. 노을보다도 한층 붉은 딸기가 자라는 곳이기도 하고요."

  "딸기밭에 데려가 주시려고요?"

  유리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갈래?"

  "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을 때 집에 가서 딸기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노을이 지기 전에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우는 차의 속력을 높였다.

  삼십여 분 달려서 딸기밭으로 들어갔다. 원두막으로 올라가자 아래쪽으로 산을 양편에 끼고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하늘은 불이 붙어 불게 타오르고 있었고, 강물도 붉게 타올랐으며, 머릿속도 이내 붉게 타올랐다.

  주인 여자가 바구니에다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딸기를 한 바구니 따왔다. 정우는 철새들이 수면을 박차고 비상하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몇 번 와 보았지만 그 어느 때 보았던 풍경보다도 아름다웠다.

  "노을과 딸기는 잘 안 어울리는 거 같지?"

  정우는 딸기를 조심스럽게 깨물어 먹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음‥‥‥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요. 뭐랄까요? 노을은 노인 같고, 딸기는 어린아이 같다고나 할까요?"

  유리가 서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윤회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을이 딸기고 딸기가 노을이지. 페르시아 공주가 유리고, 유리가 페르시아 공주인 것처럼‥‥‥."

  정우가 스쳐 지나가는 척하면서 슬쩍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사막의 여행자와 눈을 맞춘 별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반짝 빛을 냈다.

  "우와, 배부르다!"

  칭찬이 쑥스러웠는지 그녀가 과장되게 말했다. 귀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기운이 볼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정우는 얼굴의 미소를 지우면서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강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딸기를 깨물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손에는 금방 떨어진 딸기 꼭지가 들려 있었다.

  "유리야, 나랑 사귀어 보지 않을래?"

  "네에?"

  유리가 당혹스러운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선을 떨구지는 않았다.

  "나는 유리 같은 스타일을 좋아해."

  정우는 준비해 온 말을 속삭이듯 내뱉었다.

  "페르시아 공주 같은‥‥‥ 사막에 부는 모래 폭풍을 피하기 위해서 머리와 얼굴은 차도르로 가리고 있지만‥‥‥ 얼굴 선이 뚜렷하여 한번 본 이들을 잠 못 들게 만들고‥‥‥ 눈동자는 사막의 별을 닮아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둡고 고단한 길을 헤매다 지칠 대로 지친 가엾은 영혼을 구원해 줄 듯한‥‥‥."

  유리의 눈동자 한가운데서 촛불처럼 일렁거리던 빛이 조금씩 커져 갔다. 몹시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지막 화살을 그녀의 심장을 향해 쏘아야 할 순간이었다.

  "이제, 나‥‥‥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으려 합니다. 그대를 만났으니 나 이제 그대의 가슴속에서 우주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머물고 싶습니다."

  정우는 말을 마치고 나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긴장된 순간이 흘렸다. 유리는 갑자기 굳어 버린 듯 꼼짝 않고 있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제 후회하셔도 소용없어. 영원히 이 손을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두려워요."

  "두려워하지 마. 머지 않아‥‥‥ 살아오면서 한 선택 중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니까."

  정우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서 붉게 타오르는 하늘과 강과 산과 들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모두 타 버리고 재만 남을 때까지.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 비목(比目) - 당나라 시인 노조린의 시에 나오는 물고기
          ㅡ 시인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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