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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의 원인

오일 |2006.12.29 22:28
조회 823 |추천 10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
1. 들어가는말
2. 戰爭의 배경
1)經濟的 원인
2)政治的 원인
3)外交的 원인
3. 戰爭의 勃發과정
4 베르사유체제
5. 前後의 정치 향상
6. 戰爭이후 사상변화
<歷史的관점>
1. 國際的 긴장의 격화
2. 제1차 대전의 발발과 경과
3. 1차대전의 성격
4. 1차 대전후 국제질서 변화
5. 베르사유 체제
<軍事的관점>
1. 民族主義의 猖獗 the rise of nationalism
2. 국가들간의 同盟과 확립
3. 戰爭의 발발 beinging of the war
4. 塹壕戰 trench warfare
5. 마지막 무대 the final stage
6. 美國의 參戰 the united states enter the war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해서거나, 자기보호의 본능에 의해서거나, 약탈을 위해서거나 아니면 또 다른 여타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서로 간에 많은 싸움을 벌여 왔다. 이런 싸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것이 바로 세계대전이다. 세계대전은 국지적으로 일어났던 전쟁도 아니였을뿐더러 물량 면에서도 엄청난 수치를 보여준 전쟁이었다. 세계대전은 20세기에만 두 차례가 일어났다.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중 여기서는 제 1차 세계대전에 관해 그 원인과 전세, 진행과정, 결과와 영향을 알아보겠다.
2. 戰爭의 배경
1) 經濟的 원인
경제적 원인들은 1871년부터 본격화된 국가들 사이의 산업적·상업적 반목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가장 첨예하게 경제적으로 대립된 국가는 바로 영국과 독일이었다. 독일은 1914년경 영국의 경제를 따라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다. 독일의 제품이 해운업에서도 세계를 제패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독일에 라이벌 관계를 가진 국가는 프랑스였는데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산지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은 더욱 크게 성장하였다. 또 러시아와의 반목을 들 수 있는 데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과 터키의 몇 지역들을 탐내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오토만제국을 그들의 상업구역으로 계획하고 있어서 양자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과의 반목은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일어났는데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자원과 무역기회를 가지려는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두 번째 경제적 원인은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부설문제였다. 이 철도의 부설은 보소포루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강의 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의 완성을 의미하고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자본투자에 의해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간 각각의 이해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하였으나 독일은 375마일 철도선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킨 것이다.
2) 政治的 원인
1차 세계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자리잡았으나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the Greater Serbia scheme, the revenge movement in France, the Pan German movement이었다. 오스트리아가 1908년 보스니아가 헤르체고비나를 졸지에 병합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함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들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불었다. 결국 이중왕국에 반대하는 음모들이 일어나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자를 암살하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의 감상적인 희망이며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경찰이었다. 이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슬라브국가로 발칸의 여러 민족들의 희망이 되었고 프랑스의 보복운동은 1870년이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범독일운동은 1895년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유럽의 모든 튀톤족들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모토로 하여 독일제국의 위성제국을 주장하였다.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는 3제동맹(1873, 오스트리아, 러시아)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터키영토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의 불편한 관계를 가지면서 3제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3국동맹(the Triple Allance)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격리정책은 유럽의 비스마르크 업적을 무너뜨리려는 외교적 변화를 맞는다. 비스카르크가 은퇴한 사실과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로 오스트리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범슬라브주의로 오스트리아의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재정적 결속으로 정치적 동맹의 길이 열린 것은 바로 이러한 외교적 변화를 가져온 원인이다. 또한 영국이 고립정책을 파기하고 이탈리아가 3국동맹을 이탈함으로써 비스마르크의 고립정책은 변화를 맞이하였다.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3국협상(the Triple Entente)의 결성이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이중동맹이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협상을 이끌어냈고 마지막 단계로 영국과 러시아와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1907년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동맹과 3국협상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3국동맹은 이탈리아의 이탈로 약화되었고, 3국협상도 처음에는 발달하다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병합에 대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간의 다툼으로 틈이 벌어졌다. 게다가 영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세르비아로 하여금 알바니아를 포기하도록 하였고 강대국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만드는 영국의 기본외교정책으로 말미암아 3국협상도 그 갈 길을 잃었다.
3) 外交的 원인
1905년과 1913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국제적 위기사건들이 제 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원인인 외교적 원인이 된다. 모로코 위기는 프랑스와 독일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야기되었다. 1880년 마드리드회의에서 모로코의 경제적 특권은 모든 국가 대표자들에 의해 동등하게 공유된다고 규정하였으나 프랑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모로코의 독점을 원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1904년 영국과 협정을 맺고 슐탄지역에 새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드디어 모로코는 분할되었으며 지브할타르 반대편의 작은 부분은 스페인에서, 그리고 그 나머지 부분은 프랑스에게 넘겨졌다. 독일은 1905년 이 협정의 속임수를 눈치채고 프랑스가 모로코의 권리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보상을 지불하든지 둘 중하나를 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제 2차 위기(1908)와 3차 위기(1911)가 독일의 모로코 주장으로부터 야기되었는데 결국 1911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프랑스령 콩고 일부를 양도함으로써 타결되었다. 보스니아 문제와 발칸전쟁을 일으킨 근동의 위기는 모로코의 위기보다 더 심각했다. 오스트리아는 1908년 10월 터키령인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함으로써 베를린조약을 전면적으로 어겼다. 이에 분노한 세르비아인들이 러시아에게 호소하였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게 강력한 경고를 전달하였다. 또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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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뻗?틸痼?마지막전투에서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아래 대승하게된다.오스트리아역시 11월3일 정전조약에 서명한다.영국은 해군을 동원해 독일을 봉쇄하고 독일군은 독일에서의 반란을 일으키고 정부에 평화를 요구한다.독일은 1918년 11월11일 항복하게되다. 독일은 연합국의 라인강내부로의 진주를 허용하고 완전 무장해제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전쟁이 끝난 것이다.
맺음말
과도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제국주의는 19세기 후반 20여 년 간 격화되어 약소 후진국과 민족을 희생양으로 삼는 한편 제국주의 국가들 상호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협상과 동맹을 맺어 두 집단으로 대립하게 되어 결국은 제 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상 유례 없는 대참 극을 일으키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체제는 제 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세계평화를 위해 국제연맹을 탄생시키는 등 갖가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입은 심각한 피해를 치유하기에는 역부 적이었다. 전쟁이 가져다 준 히스테리, 원망, 피해망상증과 같은 정신적 부담은 패전국뿐 아니라 승전국에서도 별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승전국 사람들도 전쟁으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자국의 이익과 우월성의 강조로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간에 아무런 득실로 얻지 못한 채 각국의 커다란 경제적 손실과 정신적 피해만 입히는 결과를 초래한 커다란 참극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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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9권 P.342∼349, 브리태니커·동아일보, 1996
-이정희, 동유럽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95
-학원세계대백과사전 제26권 P.157∼164, 학원출판공사, 1993
-한국세계대백과사전 제8권 P.4434∼4445, 동서문화, 1995
-안병영 외, 동구제국의 역사적 형성, 박영사, 1986
-동구사연구회, 격동의 동구 현대사, 도서출판 좋은책, 1990
- 마이클 하워드·로저 루이스, 차하순외 옮김,『20세기의 역사』, 가지않은길, 2000.
- 차상철 외, 『미국외교사』, 비봉출판사, 1999.
- 민석홍, 『서양사 개론』, 삼영사, 1998
- E. M. 번즈 외, 손세호 역, 『서양문명의 역사』 Ⅳ, 소나무, 1997.
-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2.
- 최웅, 「제 1차 세계대전과 미국사회」, 『역사학연구』6,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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