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로(初老)의 길목에서
고령화 사회인 일본에 가면 노인들이 많습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허리 구부정한 노인들이 길거리에, 경로당에, 방안에 넘치며 병원에는 감기기운만 조금 있어도 달려온 노인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예부터 긴 수명은 자랑거리고 복 받은 일이지만 평균수명 75세가 넘는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제 나이 55세,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만으로는 53세입니다. 그러나 55세부터 연소노인으로 취급한다는 어느 게시물을 보니 참 착잡한 심정입니다. 앞으로 노인문제는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렇다고 빨리 죽으라고 감히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가난합니다. 봉급에서 적지 않은 돈이 사회복지연금으로 빠져 나갑니다. 그러나 갈수록 노인이 많아지니 복지연금은 거덜 날 지경입니다. 우리나라도 벌써부터 국민연금이 바닥난다고 난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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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어느 쥐는 그 개체수가 많아지면 한꺼번에 바다에 뛰어듭니다. 집단자살하여 종족의 적당한 숫자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행동은 쥐뿐이 아니라 다른 동물에게도 보여 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비록 늙었지만 멀쩡한 사람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살기 좋아서 사는 것보다는 죽지 못해 사는 감정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어느 영화에 마치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고려장 같은 풍습을 지닌 마을을 배경으로 한 것이 있었습니다. 늙어서 수족을 못 쓰면 자식의 등에 업혀 죽음의 골짜기로 향합니다. 영화의 이야기지만 어느 할아버지는 죽지 않겠다고 울면서 자식의 등에 업혀왔고 매달리는 아버지를 자식은 골짜기에 던졌습니다. 이웃의 다른 노파는 식구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고 자식의 등에 업혀 옵니다. 여기저기 해골이 구르는 골자기에 앉아서 떠나지 못하고 우는 자식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웃으며 손짓합니다. 그 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얹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죽음을 맞이합니다.
너무도 엄숙한 영화장면에 그만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인생이란 과연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삶도 제 몫인 것처럼 죽음도 제 몫입니다. 삶을 찾아 평생을 지낸 것처럼 죽음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는 엄청난 현실입니다. 물론 죽지 않으려 아등바등 대도 죽고야 말겠지만, 영화에 나온 노파와 같은 용기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인도의 성자는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이 많습니다. 돈도 벌어보고, 명예도 가져보고, 아내와 자식도 거느리던 가장이 늙으면 다 버리고 길거리로 나섭니다. 구걸하여 얻어먹고 길바닥에서 잠자고, 그러다가 병들어 죽거나 얼어 죽습니다. 신에게 몸을 맡겨 간지스강에 날리는 뼛가루로 지상을 떠납니다. 그들의 숭고한 신앙심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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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에 나온 노파의 용기나 인도의 성자와 같은 신앙심이 없습니다. 극작가 버나드쇼의 생전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대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가 바로 제 삶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양식이 주어질 때까지, 병으로 죽기 전까지는 염치없는 늙은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인생은 오십부터다, 육십부터다, 하는 소리를 하며 설치지 않습니다. 영국의 철학자며 수학자, 사회학자인 러셀경은 90이 넘을 때까지 꾸준히 후학을 위하여 저술했습니다. 팬을 놓자마자 그 다음날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조선일보에 <이규태코너>라고 몇 십년간 글을 연재한 이규태씨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의식불명 될 때를 대비하여 마지막 고별인사를 써 놓고 며칠 있다가 타계했습니다.
삶보다는 죽음이 우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쉬움이 없어야 합니다. <혼불>로 유명한 최명희작가는 오십을 갓 넘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결혼도 안하고 홀로 방에 들어앉아 17년간 심혈을 기울여 <혼불>이라는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미완의 작품이지만 10권까지 다 저술하여 세상에 내놓은 후 일년도 안 되어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임종의 자리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잘 살다 갑니다.”라며 눈 감았습니다. 노후보험이 얼마나 나온다, 연금이 얼마다, 자식이 얼마씩 용돈을 준다, 등등 노인들이 점점 왜소해져가는 것 같습니다. 이미 살만큼 살았다면 굶으면 어떻고 가난하면 어떻겠습니까, 버림을 받은들 섭섭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요점은 바로 하늘과 당당히 맞서는 용기 있는 노인입니다. 염치를 아는 노인입니다. 몇 십 년 전이면 이미 죽었을 나이지만 이렇게 피둥피둥 살아서 젊은 사람의 양식마저 축내며 지낸다는 미안함이 앞서서, 길을 가다가 쓰레기를 줍기도 하고, 젊은 사람이 길을 물으면 더욱 친절하고, 마음속으로 모두모두 행복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투명한 눈동자로 먼 하늘을 바라보며 눈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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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초로의 길목에 접어들어 건방진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최소한도 나이값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어제는 길가다가 주차장 구석에 앉아 계시던 70은 넘어 뵈는 노인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이가 빠진 홀쭉한 입술을 달싹이며 아주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도 더 늙으면 저렇게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아르바이트 게시판에 올려진 글을 보니, 어느 아주머니가 김밥을 한 줄 먹고는 두 줄 값을 냈다고 합니다. 구석에서 김밥 한 줄을 놓고 우물거리는 노인의 김밥 값까지 냈다는군요. 아르바이트 하던 이십대 여성이 감동하여 올린 글이었고, 꼬리글도 모두 감동 섞인 글이었습니다. 비록 소수지만 이렇게 서로 배려하고 친절한 세상이 참 좋기만 합니다. 초로의 길목에서 저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글 / 은하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