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를 위한 문학적 각색
서른 중반의 여자 친구가 고민을 얘기해 왔다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는데 뭔가 비정상적인 것 같다는 내용이 그 골자였다. 많이 고민하고 번뇌한 모양이다.
그 친구는 20대 때부터 신분상승을 꿈꾸어 왔고 잘 갖춘 남성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그 희망으로 사는 듯 했다. 틈나는데로 신분상승 편입에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영어회화,수영 등 제반 교양을 쌓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을 끌어 올려줄 주인공이 리무진만 가져오면 바로 앉을 준비는 다 갖춘 셈이였다. 그런데 여태까지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다가 남자쪽 부모와 친구의 친분이 있는 분의 주선으로 맞선을 본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여자 친구가 기다렸던 대상으로 판단 적극 대쉬를 했고 일년이 다 되어 가도 남자 별호감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결혼이라는데 도통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결혼 회주의자인듯 했다. 이 부분이 여자 친구의 가슴앓이 앓고 있는 실체였다. 이럴 때 여자 친구에게 연애관이 어떻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느꼈다. 이것이 남들이 말하는 남여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단정짓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왜냐면 예전에 그 친구에게 연애적 연민을 느껴보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호 성이 다를 때 직설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말해줄 수 없음이 참 안타까운 그런 것이었다. 왜일까. 인간의 심리란 성이 달라질 때 가까운 사람은 좋거나 곱게 보이고, 상대편 성을 가진 사람은 왠지 모르게 궁색, 작아 보이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내가 남감해 하는 부분도 솔직히 얘기를 한다고는 하지만 인정 굴절현상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오빠의 여자 친구가 작아 보이는 것이나, 여동생의 남자 친구가 못 마땅해 보이는 것 또한 같은 심리가 작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궁리 끝에 파이란 영화를 선택해서 영화를 뜯었다 붙였다. 좌우로 세웠다 하는 시물레이션 대화법으로 해석하기로 마음 먹었다. 실제 파이란 영화는 보이지 않은 심리가 많이 등장하는 영화 삼류적 삶을 다뤘기에 더 그럴지 모른다. 실제 파이란 영화는 아주 착한 영화다. 파이란은 고전적인 이야기. 즉 비참한 남자가 순결한 여성을 통하여 정신적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의 구조. 주인공 강재는 아무런 느낌없이 파이란의 장례 절차에 참석하였지만, 강재는 그 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얘기지 않은가?
여자 친구는 더욱 더 감정의 늪으로 빠져 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된 감정의 늪이 초기에는 자기가 원하는 소리는 달콤하게 들려지고 반하는 소리는는 귀엣가시로 들리는 것이 초기 증상이기도 할 터인까.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상사병으로 전이 되어 간다. 상황에 따라서는 스토커적 기질이 이입되거나 상대에 대한 막연한 동경 상태로 접어드는 심리 상태를 가진다. 이렇듯 떠나는 배에 있는 상대가 깃표처럼 그 자리에 있지만 그녀 혼자 조급해지고 상대방이 멀어져 간다는 조급증이 갈수록 심화된다.
가끔 삶이란 인터넷 속의 가상 인물처럼 고유한 ID가 존재하지만 가상 공간 밖으로 나오면 그때는 이미 생명력이 상실되 듯. 일본 만화영화 센과 히치로의 행방불명 보면서 뭔가에 열심히 고난받고 살다 왔지만 영화 끝에는 봄날의 긴 꿈처럼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왜 이렇게 먼지가 쌓였지로 끝날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여자 친구를 신 파이란으로 규정짓고 얘기를 전개 하고자 한다. 신 파이란은 한 여자로 인하여 강재가 변화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여성의 억압을 교묘하게 은폐하게 된다.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희생에 대한 예찬은 많은 경우 가혹한 가부장적인 질서를 정당화하는 요소로 기능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그렇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러한 여성의 구원자적인 관념을 여성 억압적인 요소로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남성을 구원하는 여성이라는 환상에 대한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이러한 환상의 요점은 환상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하겠다. 우리의 신 파이란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일정한 거리두기의 역설을 권하고 싶다. 사랑은 사랑의 부재를 통하여만 더욱 깊어진다는 역설. 영화에서 만일 파이란이 죽기전에 강재의 비디오방에 왔을 때 두 사람이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파이란은 크게 실망하였을 것이며 희망을 상실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 하였지 모른다. 강재는 파이란을 단순히 위장 결혼의 상대방으로만 보았을 것이다. 이는 연애에 성관계는 없다의 또 하나의 변주가 아니겠는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실제적인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환상을 구성한다.
파이란에서 처럼 나온 환상의 메커니즘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신 파이란은 자신을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남자를 남편으로 생각하며 행복해한다. 물론 파이란도 이러한 환상이 실제에 근거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란이 강재를 죽기전에 실제로 만났다면 환상과 실제와의 거리는 붕괴되고 파이란은 비참해졌을 것이다. 이는 환상은 좋은 것만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신(神)에 근접한 범인(汎人)의 범주에 머무르고 승화된 인간으로 그려지는 특성이 있다.
이 이야기는 동화 벌거 벗은 원숭이 임금님 처럼 객관적인 이론으로는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주관적 감정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모두가 원숭이 임금이 발가벗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신 파이란 또한 비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능동적인 환상을 만든다. 강재는 파이란이 자신을 대상으로 환상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격한다.
신 파이란이 만든 것 또한 환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 그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호감을 보였고, 사랑한다고 했고, 결혼을 했고, 오붓하게 가정을 이뤘다면 얘기꺼리가 되지 못한다. 신 파이란이 그 남자와 다른 점은 파이란은 고운 마음을 가졌고 다른 사람을 비록 자신을 위한 환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었지만 그 남자는 남을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받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환상의 생성에 있어서 이미 존재한 파이란의 환상을 기초로 자신을 환상을 만든다. 물론 파이란이 죽었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강재를 변화시키지만 말이다.
이 영화에 나온 사랑은 지나치게 비참하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이런 엇갈린 만남을 통하여 환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신 파이란에서 두 남녀는 희망이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있으며.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오로지 사랑이라는 환상으로 극복한다. 가장 좋은 것은 많은 그 남자와 신 파이란이 서로 엇갈리는 만남을 통하여 서로에 대한 환상을 통하여 비참한 상황을 극복함이 없이 평범하게 서로 만나면서 사랑을 하는 현실일 것이다. 그것이 가장 좋지만. 그것이 안되는 경우 이런 슬픈 환상이 나오는 것이다.
강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자신이 사랑받았다는 것(비록 일상적이 의미에서의 사랑은 아니지만)이었다. 욕망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강재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게 하듯 신 파이란도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려는 욕구를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일에 더 시간적 소비를 말아야 한는 것이 진정한 주체의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