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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 일러스트풍의 치명적일 것 없는 연애... <사랑스러워>

백혁현 |2007.01.20 11:09
조회 97 |추천 0


 

  “... 빨간색 유리 풍경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열두 번까지 세었을 때 나는 잠이 들었다. 수를 세는 것은 내 습관으로 길을 걸을 때는 전봇대 수를 세고, 빨래를 갤 때는 접는 횟수를 세고, 영화를 볼 때는 화면에 나타나는 개의 수를 센다. 셀 것이 없어 손이 심심해지면 손가락을 이용해 이진법 계산을 한다.”

 

  무엇이든 세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나 마리에가 잠을 자는 동안 언니 유리에는 자신의 긴 머리로 그녀의 다리를 감아버린다. 결국 두 사람은 그렇게 얽혀버린 머리를 풀지 못해 어머니인 가나코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흑백 사진 속에서 항상 모자를 쓰고 있어 모자씨로 불리우는 그녀들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번역된 책을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설명에 의하면 일본어를 사용함에 있어 아리땁기로 유명하다는 작가의 소설은 마치 몽환적인 (딱 일본풍이어야만 하는) 일러스트들과 함께 본다면 매우 좋을 법하다. 새는 날아다니고 두 소녀는 죽은 듯이 누워 있고 한 소녀의 머리카락이 다른 소녀의 다리에 감겨있는 표지 일러스트의 뉘앙스가 바로 소설의 뉘앙스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세 모녀는 원숭이를 기르고 춘화를 그리는 일을 하는 두 번째 아버지를 갖게 되지만,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죽는다. 그렇게 두 명의 아버지를 잃은 소녀 그리고 그들의 엄마는 더 이상 아버지를 두지 않지만, 어느새 엄마의 손을 그리는 치다 씨는 주말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이가 된다.

 

 『 “이런 이름은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요?”
  “아는 사람도 많지만.”
  “많지만?”
  “알아봐야 별 볼 일 없어.”
  “왜요?”
  “알면 말이지, 틀에 박힌 규칙을 따르느라 더 신경 쓰이거든.”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사실은 말이지, 규칙과 규칙 사이가 좋은 거거든.”』

 

  춘화를 그리고 그 체위의 명칭을 묻는 의붓 딸들에게 이런 설명을 할 정도의 쿨한 두 번째 아버지나 사진으로만 남은 첫 번째 아버지도 그렇지만 이제 세 번째로 그녀들의 삶에 스며든 치다 씨도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일본 작가들의 소설에는 어지간하면 악한 인물들이 나오지 않는다. 음, 생각해보니 장르 소설을 제외한 다른 현대 소설들에서도 특징적인 악한이 잘 나오지 않는 것도 같다.)

 

  그렇게 마리에와 그녀의 언니 유리에는 성장을 해서 마리에는 여고의 선생님이 되고, 유리에는 대학원에 다닌다. 마리에는 자신의 학생인 미도리코의 오빠 고로와 연애를 시작하고, 유리에는 학교에서 만난 오토히코 씨의 살찐 몸이 너무 좋아서 그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등장인물들의 괴상한 관계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환타지에 가까운 신체 변형이 도를 더해간다.

 

  마리에의 학생인 미도리코는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치다 씨와 관계를 맺고 있고, 섹스를 할 때마다 신체 일부의 뒤틀림 현상이 나타나 이를 계기로 치다 씨로부터 1회에 2만엔씩 돈을 받고 있으며, 이를 지금까지 한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유리에의 사랑스런 오토히코 씨는 자기 맘대로 휴면 상태에 들어갔다가 (아이를 낳듯이) 자신의 허물을 벗고 또 다른 아이를 만들어낸다. 그 사이 ‘고로의 몸에 식물의 줄기처럼 감겨’들던 마리에는 결국 고로 씨와 헤어지고, 미도리코에게서 ‘숲 속에 있는 철도차량기지의 쇠붙이 냄새’가 난다며 그녀를 ‘운명의 여인’으로 삼던 스즈모토 스즈로도 오셀로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그들 곁을 떠난다.

 

  “... 미도리코에게 있어서 치다 씨와의 섹스는 한밤중 몰래 일어나 읽는 슬픈 소설 같은 것이었다. 읽고 나서 혼자 눈물을 흘리면 너무나 기분이 좋아 그만 둘 수 없다.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 한심해서 쓸쓸하고 안타까워지지만, 그만둘 수 없는 것이 기쁘기도 하다. 그런 것이었다.”

 

  동성애와 유아성애, 근친상간과 원조교제와 같은 (유령들의 정사를 포함해서) 성적인 코드가 짙게 깔려 있는데도 실제로 소설이 풍기는 분위기는 동화에 가깝다. 등장인물들은 쉽게 혹은 어렵게 연애를 하고, 그러한 연애로부터 상처를 받는 대신 상대방의 상처에 호의를 베푼다. 무심하기 그지없는 자신으로부터, 혹은 상대방으로부터 주눅드는 대신 혼자서도 잘 한다. 그러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좋아하기로 결정하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그래서 치명적인 관계 혹은 치명적인 사랑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우리들이 치명적이라고 이름 붙였거나 그렇게 여기고 싶어 할 따름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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