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제3국의 중심에서-2차세계대전사

이대희 |2007.01.23 01:05
조회 66 |추천 0

 안녕하세요? 맛있는 토스트 BOOK 입니다

 

지난주에는 우연히도 다른 출판사에서 각각의 주제를 갖고 2차대전과 관련된 2권의 책이 나와 관심을 끌게되었다. 953페이지(기억)와 911페이지(2차세계대전사)의 두터운 분량과 하드커버로 되어진 것도 비슷하고 실제로 본문에 실린 화보도 겹치는 부분도 있는 책들이다. 하지만 전자의 책 '기억'은 히틀러의 건축가이이자 독일군의 전쟁 물자를 총괄한 군수장관으로,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서 살아남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알베르트 슈페어의 자서전 성격을 띄었고, 후자의 책'2차세게대전사'는 2차세계대전의 원인과 경과를 집중 조명한데서 같지만 엄연히 다른 성격을 띈 책들이다. 이제 그 2권의 책이 다른점과 공통점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하자.

 

기억-제3국의 중심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현대사의 블랙홀이다. 지난 세기의 모든 문제는 20세기를 양분한 이 소용돌이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엮이기 시작하면, 엉키고 꼬인 실타래를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때문에 이런 복잡한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연대기 역시,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저술에서부터 아렌트와 최근의 여러 성과에 이르기까지 끝이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완전한 파멸을 맞이할 때까지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은 당사자들에게(가해자들에게조차) 기억을 정리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치제국에 관한 지식이 쌓여가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이유도 살아 있는 육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괴테가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가 직접 건네는 증언이 악마와 그 주변을 더 생생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오버잘츠베르크의 집무실에서 슈페어의 건축 설계안을 함께 살피는 히틀러. 1934년 봄.


'기억'의 저자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3제국의 핵심 세력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히틀러는 제외하고라도 괴링, 괴벨스, 히믈러, 칼텐브루너처럼 정신분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무리 가운데 슈페어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고 얼마 되지 않은 지식인(괴벨스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이었다. 슈페어는 만하임의 전형적인 중산층 부르주아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건축가가 되길 희망한 슈페어는 뮌헨과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다. 당시 독일 건축계를 주도하던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테세노의 조교를 하던 와중에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나치당에 가입한다. 당시의 많은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정치적 신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히틀러의 개인적 매력에 매료되어 나치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나치당 청사 공사에 참여하게 된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장식과 시각적 장치를 맡아 유례없는 성공을 거둠으로써 '히틀러의 건축가'로 자리매김한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대중선동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장치를 만든 이가 바로 슈페어였다.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히틀러와 함께 독일제국의 건축과 도시계획을 관장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법정 내부 모습

왼쪽에 피고석이, 그 뒤로 통역 부스가, 오른쪽엔 판사석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사이에 변호석과 검사석이 위치해 있다.

 

체포된 슈페어는 다른 1급 전범들과 함께 뉘른베르크 국제 전범재판의 법정에 선다. 변명으로 일관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슈페어는 제3제국의 지도부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자기반성과 자기변호를 절묘하게 뒤섞은 슈페어의 태도는 검사와 판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피고 유형이었고, 심지어는 '선량한 나치'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군수장관으로서 슈페어는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수생산에 동원한 최종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 노동력 동원의 실무 책임자 자우켈이 교수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슈페어는 20년형을 언도받는다. 이로써 슈페어는 제3제국의 각료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에펠탑을 둘러보고 돌아가는 히틀러 일행

히틀러의 오른쪽에는 슈페어와 헤르만 기슬러가, 왼쪽으로 아르노 베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뒤에 마르틴 보어만과 카를 브란트가 따르고 있다.


예술가의 꿈을 좌절당했던 히틀러는 파리를 함락시킨 후, 파리로 예술기행을 떠난다. 물론 슈페어도 함께 동행했고, 슈페어와 히틀러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과대망상적인 건축계획의 꿈을 불태운다. 군수장관이었던 토트 박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히틀러는 37세의 슈페어를 독일군 전체의 군수물자를 책임지는 군수장관의 자리에 앉힌다. 제3제국 최연소 장관이었다. 군사적인 업무엔 완전한 문외한이었음에도 슈페어는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했고,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군부의 반란주동자들조차 슈페어는 계속해서 군수장관직에 있어야 한다고 여길 정도로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군수와 전시 경제를 장악한 슈페어는 "예술가 정치인"을 선호한 히틀러의 2인자로 불렸다. 점령지의 강제수용소의 노동력을 군수생산에 동원하면서 수감자들의 인권을 짓밟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패배한 독일에는 폐허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히틀러에 맞서 독일의 문화유산과 산업시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인물도 슈페어였다. 괴벨스, 히틀러와 달리 자살할 마음이 없었던 슈페어는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체포된다.

 

자신의 감방에서 문서를 작성 중인 알베르트 슈페어,1946년.

 

슈페어는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메모광이었기에 '기억'을 저술할 수 있었다. 군수장관으로서 작성한 업무일지, 편지, 전보 등을 바탕으로 내부자가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용들을 슈페어는 비할 데 없이 생생하게 묘사한다. 예컨대 반유대주의로만 이해되는 히틀러의 인종주의는 체계적인 사고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조야한 편견의 산물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연거푸 금메달을 목에 건 제시 오언스를 두고 정글 출신의 흑인은 미개하지만 체력은 문명화된 백인보다 강하기 때문에 흑인과 시합을 벌이는 건 공정하지 못하며, 러시아인의 체격이 우수한 걸 이유삼아 독일군이 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자조하는 히틀러의 우스꽝스런 인종주의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다. 한편 핵물리학을 유대인의 학문으로 치부한 히틀러의 편견은 오히려 다행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 세계의 밀리터리 마니아들에 의해 낭만화되고 부풀려지기 일쑤인 독일군의 무기와 V2로켓을 비롯한 페네뮌데의 비밀무기가 얼마나 실패였는지도 이 모두를 담당했던 군수장관의 입으로 확인할 수 있다.
"히틀러에 관한 가장 내밀한 묘사"라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대로 '기억'은 매쪽마다 실제 경험한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건강에 대한 히틀러의 불안과 사이비 의사에 대한 맹신, 식생활과 개와 같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측면,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움직일 것처럼 보이는 나치 제국이 실상은 관료주의의 병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등. 그리고 무엇보다 제3제국의 두 건축가, 히틀러와 슈페어가 꿈꾼 베를린 도시계획의 과대망상적인 규모와 배치는 제3제국이 얼마나 헛된 망상 위에서 가까스로 지탱되고 있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전선이 붕괴되는 시점에서도 히틀러는 미래에 세울 천년왕국의 단꿈에 빠져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파멸이 눈앞에 닥치고 히틀러의 후광이 사라졌을 때조차, 심지어 명령에 불복종하며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마음먹을 때조차, 히틀러에게서 완전히 돌아서지 못했던 슈페어의 모습은 독일 전체를 감싸고 있던 광기와 미망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산책을 마치고 지휘본부로 돌아가고 있는 히틀러와 슈페어, 1942년 여름, 우크라이나.

 

저자 슈페어는 "나는 단지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슈페어는 책 전반을 통해 지식인으로서 비판적으로 사유할 책무를 잊었던 치명적인 과오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드러낸다.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탐닉했으며, 모든 군수물자의 생산을 관장하는 군수장관이었던 저자가 제기하는 기술문명에 대한 경고 또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한나 아렌트가 탁월하게 분석했듯이 아이히만은 명령의 연쇄 고리 속에서 '생각 없이'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슈페어는 제국장관으로서 모든 명령과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다. 슈페어도 단지 히틀러의 명령을 따른 자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래서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떠넘기는 동료들을 "수백만 마르크를 받는 우편배달부"라고 비난했던 유일한 인물 역시 슈페어였기 때문이다.

 

철학박사였지만 오랜 당원으로 히틀러와 비판적 거리를 설정할 수 없었던 괴벨스와 달리, 슈페어는 사유할 능력이 있던 유일한 각료였다. 그렇기 때문에 즐겁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고를 회피해 균형감각을 잃었고, 매달 내는 당회비로 정치적 의무감을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악의 고양을 낳았다고 말하는 슈페어의 자기반성은 뼈에 사무칠 만큼 절실하게 들린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비롯해 제국이 저지른 모든 악을 모를 리 없었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슈페어의 죄는 아이히만보다 훨씬 더 중할지도 모른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슈페어의 자기반성이 자기변호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까닭 역시 슈페어가 사유할 줄 모르는 한갓 관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반성과 자기변호의 줄타기는 슈페어에게 목숨을 부지할 기회를 주었고, 우리에겐 제3제국의 속살을 살펴볼 기회를 주었다. 이제 슈페어가 군수장관으로서 보낸 4년의 시간이 20년의 형기와 이 책 '기억'으로 상쇄될 수 있는지는 독자 각자의 몫이 되었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슈페어가 전조등으로 선보인 드라마틱한 광경.영국대사 네빌 헨더슨 경은 이를 "얼음으로 지은 성전" 이라고 불렀다.

 

슈페어와 히틀러의 베를린 중심부 개조 계획

남부역에서 바라본 광경,개선문과 돔형 대회의장이 넓게 조성된 가로의 축 위에 배치되어 있다.

 

1943년 히틀러의 지휘본부에 전시된 신형탱크를 확인하고 있는 슈페어와 자우어,히틀러.

에펠탑을 배경으로 선 히틀러와 슈페어가 기록영화 촬영기사 앞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

Albert Speer,Erinnerungen

(알베르트 슈페어 지음/김기영 옮김/마티)

 


2차세계대전사

THE SECOND WORLD WAR

(존 키건 지음/류한수 옮김/청어람미디어)

전세계 인구의 5분의 4를 끌어들인,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 2차세계대전

 

 

 

 

1940년 9월, 런던 선창 상공에 하인켈111 한 대가 떠 있다. 독일 공군은 에스파냐 내전 동안 하인켈111 이 그리 대단치 않은 저항을 상대로 거둔 성공에 들뜬 나머지 기관총 8문을 단 영국 공군 전투기가 주는 위협을 얕잡아 보였다.

 

 

아라스 역공에 참여한 영국군 전차연대 대원이 됭케르크에서 돌아오고 있다.

 

 

1942년 가을에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스탈린그라드 방자를 찌은 소련 측 선전용 사진. 그러나 전투 광경은 거짓이 아니다.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시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스탈린그라드 도심은 돌무더기로 바뀌었다.

 

 

"1944년이 되면 전차는 칼처럼 적의 전선을 찌르기보다는 야금야금 갉아서 저항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거두는 정교한 전술적 소모 기구조직에 속하게 됐다." 2차대전의 판세를 크게 뒤바꿔 놓은 팔레즈 전차전을 서술하기 앞서 존 키건(Keegan)은 전쟁 전기와는 크게 달라진 전술무기의 변화를 면밀히 짚는다. 이어지는 복잡한 전황의 서술은 사실과 냉정한 평가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패튼 휘하 제3군의 생-로 돌파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구 국가의 1개 군이 성공한 최초의 전격전이었다."

이 책은 대단히 포괄적이면서 전문적이고, 다층적이면서도 집요하고, 방대하면서도 분석적인 전사(戰史)다. 영국의 전쟁사학자인 저자는 7년 동안의 전쟁을 꿰뚫어 보는 전지적(全知的) 전략가의 시각으로 전쟁의 숲과 나무를 모두 그려낸다. 정치·외교·사회·문화·심리와 같은 측면을 빼놓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인 전략 전술과 전황을 냉혹할 정도로 건조한 문체로 다룬다. 기상천외한 무용담이나 영웅담도, 독자의 동정을 유발하는 장치도 없다. "1945년 8월 6일 아침에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뜨린 것은 원자폭탄의 우라늄 235형이었다. 몇 시간 뒤 7만8000명이 폐허 속에 쓰러져 죽거나 죽어갔다"는 식이다.

저자는 매우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 전사를 유럽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태평양전쟁으로 나눈 뒤 1943년을 기점으로 각 전역을 다시 둘로 나눠 모두 여섯 개의 장(章)으로 구분한 것. 크레타 공중전, 미드웨이 해전, 팔레즈 전차전, 베를린 시가전, 오키나와 상륙전 등 다섯 개의 주요 전투는 현미경을 들이댄 듯 특히 자세하다.

그동안 의혹을 남겼던 전쟁의 몇몇 대목들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석을 내린다. 왜 히틀러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33만여 명이 된케르크에서 철수하는 것을 방치해서 전쟁의 운명을 바꿔 놨을까? 그곳 주변의 운하와 하천에서 독일군 기갑부대가 수렁에 빠져 꼼짝 못하게 될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U-보트가 해전의 흐름을 되돌리지 못했던 것은 1943년 10월이 되면 연합국의 선박 건조량이 U-보트에 의해 격침당한 톤수를 앞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영국인이라는 한계는 서부전선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냈던 독·소전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룬 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영국에 대해 찬사를 보낸 것만은 아니다. 독일 민간인 60여만명을 죽게 하고 80여만명에게 부상을 입힌 영국 폭격기사령부의 전략과 영국민의 이중적인 태도는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전쟁의 유산(遺産)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전쟁의 대가는 전쟁의 보상을 넘어선다는 믿음을 승전국과 패전국에 똑같이 안겨 줬다." 독일은 말할 것도 없고, 엄청난 인명 손실을 초래한 소련은 전후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면 자국 군인을 직접적인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삼갔다. 하지만 가장 많은 보상을 받은 미국은 이후에도 한국과 베트남에서 큰 희생을 치르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89년에 씌어진 이 책은 "2차대전의 유산이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일보 발췌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19/2007011900789.html)


 

 맛있는 토스트 BOOK 입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