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빈 방은 싸늘했다.
가은은 급히 불을 켜고 보일러를 올린 다음 이부자리를 펴
가랑잎처럼 가벼운 남자를 눕혔다.
그리고, 놀라버렸다.
밝은 곳에서 보는 남자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것도 참으로 이상한 아름다움이었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긁혀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피부는 너무나 새하얀 빛깔이었고, 머리카락 색깔도 독특했다.
부드러운 밤색인데,
마치 머리카락 올올이 살아서 따로따로 빛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은의 아버지도 핸섬한 편이었고,
가은을 끈질기게 쫓아다녀 마침내 가은과 사귀게 되었던 현성도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이토록 압도적으로 아름답진 않았다.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잠시 넋을 놓고 남자를 바라보던 가은은 서둘러 주방으로 가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더운 물에 수건을 적셔 남자의 얼굴에 묻은 피와 흙을
조심스레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을 닦아주려고 남자에게 덮어놓았던 이불을 걷었다.
화악,
순간, 가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가 거의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는 걸 잊었다.
가은은 얼른 이불을 남자의 가슴까지 끌어 덮었다.
남자의 키는 185 센티미터 정도,
어찌 보면 가은 또래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훨씬 더 나이가 많을 것 같기도 했다.
이마에 주름살이 있다거나 피부가 거친 때문은 아니었고,
그에게서 풍겨나는 분위기가 그랬다.
무척 기품 있으면서도, 어딘지 성숙한 느낌….
그런데 몸은 또 어린아이 같았다.
얼핏 본 게 다였지만, 육체노동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이 없이,
스무살 혹은 서른 살까지 가만히 누워서만 자라난 사람의 몸 같았다.
함부로 만지면 부서져 버릴 듯한, 마치 밀랍인형 같은….
‘그래서 그렇게 가벼웠던 걸까?
그렇더라도 이상해. 아무리 그래도 어른 남자인데….’
남자의 손을 닦던 가은이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으음….’
가은의 손길을 느꼈는지, 남자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소리를 뱉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정신이 드세요? 여보세요”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남자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았나 보다고, 가은은 생각했다.
일단 남자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방이 점차로 따스해지자,
가은도 견딜 수 없이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석 달째 대형마트에서 꼬박 열 시간을 서서 일했다.
때로는 새로 나온 요구르트 시음회를 했고, 때로는 초콜릿을 팔기도 했다.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벌이는 괜찮았지만,
고단한 일이었다.
다행이, 일은 오늘로 끝이었고 친절 판매 사원으로 특별 보너스도 받았다.
당분간은, 집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휴학을 한 학교를 다시 다니는 것은
아직 무리겠지만….
꾸벅 꾸벅 졸던 가은은 어느 새 스르르, 달디 단 잠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꿈을 꾸었다.
따스한 햇살이 너른 마당을 가득 채운 6월,
가은의 아버지가 정성껏 가꾼 치자나무에선
순백색 치자 꽃이 가득 피어났다.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어린 가은에게도 무척 매혹적이었다.
킁킁거리며 치자꽃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어린 가은을 안아 올리며,
젊은 아빠는 웃었다.
“향기가 좋지, 가은아? 이건 치자꽃이라고 해.
꽃은 이렇게 예쁘고 향기롭지만, 열매로는 또 노란색의 예쁜 물을 들일 수 있단다.
가을이 되면 우리 치자 열매를 따다가
엄마께 맛있는 튀김이랑 송편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송편? 튀김? 와~ 신난다.”
양 갈래로 머리를 올려 묶은 어린 가은은
아빠의 품 안에서 팔랑개비처럼 기뻐했다.
머리에 달린 붉은 리본이 팔랑팔랑 같이 나부끼었다.
“아빠….”
가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미 꿈이라는 걸 알았지만,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그 때였다.
따스한 손이 가은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누구지? 여긴 나 혼자 사는 집인데….’
잠결에 생각하던 가은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짓던 남자가 이내 코 앞에서 가은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봐요? 정신이 든 거예요? 몸은 괜찮아요?”
가은은 다급히 물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자는 웃어 보였다.
아픈 데는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젠 큰일 날 뻔 했어요.
날도 얼마나 추웠는데 그런데 쓰러져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집은 어디에요?”
가은은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지만,
남자는 방긋 웃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가은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봐요. 말 할 줄 몰라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드라마에서나 보던 기억상실증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가은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남자의 밤색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헉! 다, 당신, 외국인에요?”
남자의 얼굴에 걱정스런 빛이 떠올랐다.
" Can You speak English?"
가은이 다시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가은의 말을 알아는 듣는 것 같은데,
단 한마디도 말을 하지는 못했다.
외국인이라고 생각하니 색다른 외모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눈동자 색깔이 바뀌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가은은 혼란스러웠다.
“이, 일단, 이 옷을 입어요.”
가은은 얼굴을 붉히며,
반나체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헐렁한 셔츠를 건넸다.
남자는 셔츠와 가은의 옷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해했다는 듯 옷을 입기 시작했다.
“다 입었어요?”
몸을 돌리고 있던 가은이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몸을 돌려 돌아보니 남자는 마냥 해맑게 웃고만 있다.
눈동자 색깔은 다시 밤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후…. 자, 가은아, 진정하고….’
가은은 심호흡을 한 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말, 은, 이해, 할, 수 있어요?
이해, 할, 수, 있으면, 고개를, 끄, 덕, 여, 봐요.”
가은은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가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확실히 알아듣는 것 같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아, 픈, 데는, 없어요?”
남자가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색의 눈빛이 조금 짙게 물들었다.
‘내게 고마워 하고 있구나.’
가은은 남자의 눈빛을 보고 알 것 같았다.
“배고프죠? 뭐 먹을 것 좀 가져올게요.”
가은은 남자를 등 뒤에 두고 주방으로 갔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스럽다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한편으로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런 마음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가은은 죽을 끓이는 게 좋을지,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드는 게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문득, 어렸을 때 본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백치 애인.
'에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가은은 웃으며,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