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세양언니 ]
가은은 중저가 남성 브랜드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중저가라고는 해도 가은에겐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러나 그, 라파엘에게 가은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가 정말로 음식을 처음 먹어 본 거라면,
이 옷 역시, 그가 가진 첫 번째 옷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작은 동네 매장이긴 하지만 신상품이 여러 벌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옷을 골라본 적은 있었지만,
남자 옷을 혼자 골라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쩐지 설레면서도, 살짝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맑게 웃는 천사 같은 남자가 가은의 작은 단칸방에 잠들어 있으리라고….
“이거 예쁘다. 라파엘한텐 딱 어울리겠네.”
가은은 따뜻해 보이는 베이지색 코듀로이 바지와 흰 면 남방, 그리고 하얀 스웨터를 골랐다.
천사인지 외계인인지, 아니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느 대륙에서 온 외국인인지 몰라도,
이 정도면 그가 누굴 만나더라도 부끄럽진 않겠구나 싶었다.
가은이 고른 옷을 계산할 때였다.
“띠리리링 띠링~”
휴대폰에 있는 기본 벨소리로 해놓은 가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 세양언니?”
세양은 함께 마트에서 일하며 알게 된 세 살 위의 언니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며 여동생의 대학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착한 아가씨였다.
가은에게 늘 먼저 말을 붙이고, 마트 내의 간식거리도 꼭 따로 챙겨 놨다가 건네주곤 했다.
정을 주진 않았지만, 밝고 낙천적인 세양과 함께 있으면 어쩐지 스르르 맘이 풀어져버리는 건,
가은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시나야, 알바 끝났다고 문자 한 개 없이 그리 연락을 뚝 끊나.
내 지금 너그 동네다. 얼릉 나온나. 보고 싶다.”
“어쩐 일이에요? 언니네 집 영등포잖어.”
“오야, 내 의정부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지나는 길에 니 생각이 나서 들렀다.
새침데기 가은이 만날라모 내가 와야 안 되긋나? 히히히”
“응, 언니. 나 마침 역 근처 옷가게니까, 금방 갈게요.
거기 이번 출구로 나오면 뚜레주르 빵집 보이죠? 거기 이층에 계세요.”
베이커리 카페나 페스트 푸드점의 이층 공간을 가은은 자주 이용했다.
그 곳이라면 따로 무언가를 주문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편하게 머무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무료로 공간을 이용할 때마다,
‘저 여기 예전에 많이 이용한 거 아시죠?
사정이 나아지면 또 이용할 테니까 조금만 봐주세요.’
라고 조그맣게 이야기하는 가은이었다.
“가은아, 요다, 요.”
세양이 예의 그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크게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 정도 액션이라면 100미터 밖에서라도 금방 그녀임을 알아 볼 수 있을 거다.
가은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이고, 가시나, 밤새 얼굴이 폈네, 폈어. 일 그만두니 그래좋나?
그기 아이모, 니 어젯밤에 무슨 좋은 일 있었드나?”
“네? 일은요, 무슨. 언니는 참….”
“가시나? 이상하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가? 하하하”
확 달아오른 가은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양은 또 크게 웃었다.
가은은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세양은 가은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었다.
세양 또한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지라,
가은이 남 같지 않았다.
가은이 말수가 극히 적은 것도, 혼자 있으면 어두운 표정이 되어버리는 것도,
가은의 천성이 아니라 생활이 힘들기 때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은을 웃게 해주고 싶었다.
괜한 농담을 자주 하고, 먹을거리가 생기면 꼭 가은의 몫을 챙겨놓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다.
가은 또한 그런 세양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진심이란,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에게 다가간들 그 사람에게 짐만 될 뿐이라는 생각이,
가은을 외로운 섬으로 만들고 있었다.
“내 의정부에 있는 우리 이모 집에 갔는데 있제, 진짜 웃긴 일이 있었는기라.”
여느 때처럼, 세양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가은은 웃으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참으로 화제도 풍부하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었다.
세양과 함께 있으면 가은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깔깔깔깔. 진짜 웃기제? 내 배꼽 빠지는 줄 알았다 아이가.
근데, 니 그거는 뭐고? 옷 샀나? 아이고, 우리 가은이가 웬 일이고?
그래, 잘했다. 얼굴도 이래 이쁜 아가 맨날 입고 다니는 옷 꼬라지 하고는.
보자, 무슨 색깔 샀노? 니는 내하고 다르게 피부가 하얘서 아무 색깔이나 잘 어울리제.”
그러고 보니 라파엘은 까맣게 잊고 세양의 수다를 듣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하다.
그러나 가은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쇼핑백은 이미 세양의 손 안에 있다.
세양은 얼른 가은의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어? 이거 남자 옷 아이가?”
뜻밖의 물건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양은 물었다.
가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건 세양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던 가은은, 세양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당장은 함께 있는다 하더라도, 그가 언제 기억을 되찾을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세양은 가은보다 경험이 풍부하니 뭔가 도움이 되어 줄지도 몰랐다.
“사실은 언니, 어젯밤에 집에 오는데요….”
가은의 말을 듣는 세양의 얼굴은 놀라움과 의심과 감탄과 경이로움으로 시시각각 변해갔다.
참으로 풍부한 표정을 가진 그녀였다.
“그, 그러니까 니 말은, 이상한 남자 하나가 지금 니 방에 있다 이 말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말도 할 줄 모르던 사람이 텔레비전 한 번 보더니 술술 우리말을 하고,
죽도 처음 먹는 것처럼 말하드라고?
우와, 진짜 신기하네. 혹시 그 사람 진짜 외계인 아이가?
왜 미국 텔레비전 보면 가끔 나온다 아이가, 외계인 만났다는 사람.
근데, 그러면 니! 어젯밤에 그 남자랑 같이 있었단 말이가?
하이고야, 이 순진한 아가씨가 큰 일 날라고.
아무리 남자가 다쳤어도 그렇제, 어떤 놈인 줄 알고 들이노?
언니한테 진작 전화하지 그랬노. 안 놀랬나? 아무 일 없었고?”
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무 경황이 없어 세양에게 연락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픈 사람인 걸. 그리고 나쁜 사람 아니에요.
음…. 아기 같아요. 아무 것도 모르고, 나쁜 짓 할 사람 아닌 걸요.”
“야가, 야가, 큰일 날 소리 하네.
나쁜 놈이 내 나쁜 놈이요,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닌다 하드나.
근데 니, 벌써 그 남자 좋아하는 거 아이가?
수상한데? 옷도 사고?”
세양이 웃으며 가은은 쿡 찔렀다.
“아니에요.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걸요, 언니도 참.”
가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생전 처음 만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고, 그를 위해 옷까지 사다니….
그리고 절대로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이렇게까지 그를 믿고 있다니….
누군가를 믿는 일, 그러고 보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가은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세양 다음으로, 두번째일까..?
‘이상한 사람…….’
가은은 혼자 중얼거렸다.
“머라고?”
세양이 가은의 중얼거림을 듣고 물었다.
“이라고 있을게 아니고, 언니가 직접 가서 그 남자 한번 봐야 되겠다.
우리 가은이한테 해코지 할 놈인지 아닌지.”
세양은 정말 그러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ㅎㅎ. 언니, 괜찮대두요. 혹시 밤에 좀 그러면, 내가 언니한테 전화할게요. 그럼 되죠?
근데, 나 이제 가봐야겠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네.
그 사람 혼자 있고, 아직 아플지 몰라요. 아까 잠든 거 보고 나왔는데 이제 깼겠어요.”
“그래. 그라모 가봐야제.
니 알제? 조금만 이상한 눈치 보이면 언니한테 바로 전화하고.
니 말 들어보니 뭐 나쁜 놈 같지는 않다만, 그래도 조심해라, 알긋제?
그리고 그 사람 정신 좀 차리모 언니한테 제일 먼저 소개 시켜 주기다?
우리가 또 꽃미남 하면 사족을 못쓴다 아이가. 히히히
가시나, 우찌 생각하니까 부럽네? 인간 한번 잘 만들어봐라. 크크크”
끝까지 장난을 치며 가은을 웃기는 세양과 즐겁게 작별을 하고 가은은 집으로 올라갔다.
시간은 상당히 지나 있었다.
집에 도착한 가은이 막 현관문을 열려고 할 때, 2층에 살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가 내려왔다.
“아, 가은 학생, 마침 딱 만났네.”
어쩐지 가은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계단 세 개를 내려가는 반 지하 치고는 밝고 습한 느낌도 없는 집이라 계약을 하긴 했지만,
계량기가 따로 달려 있지 않은 물세를, 아주머니는 턱없이 많이 받아가곤 했다.
“저기 말이야, 보증금을 좀 올려줘야겠어.”
“네, 보증금을요?”
순간, 가은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6화: 외계인이라도 상관없어 ]
“그래, 가은 학생도 알 거야. 요즘 집값 무지 많이 오른 거.
요 앞집 미숙이네, 거기 신혼부부가 새로 왔는데, 학생도 알지?
그 방 가은 학생 방보다 훨씬 작은 거.
근데도 보증금을 400은 더 받았다고 하더라구.
올해가 쌍춘년이라 결혼들을 많이 해서 집수요가 부족하거든.
가은 학생 열심히 사는 거 내가 알고 그러지만,
나도 땅 파서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말야.
이달 안으로 300만원만 해줘. 안 그러면 집을 비워줬으면 좋겠네.
아이, 추워. 웬 11월 날씨가 이리 춥담?”
머리에 롤을 만 집주인 아주머니는 할 말만 다 끝내고서 팔짱을 끼고는
휭 하니 이층으로 올라가 버린다.
“저기, 아주머니! 아주머니!”
가은이 아주머니를 불렀지만, 아주머니는 가은을 쫓아내려고 결심이라도 한 듯
가은의 부름을 못 들은 체 했다.
가은은 금방, 목이 메어왔다.
서울 변두리, 보증금 700에 월 25만 원짜리 가은의 반 지하 월세 방.
그러나 무일푼이 된 가은이 이 집을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가은 이외엔 아무도 모르리라.
현관문 바로 앞에서, 가은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안에 잠들어 있을지 모를 라파엘을 깨울까 봐 숨죽여 우는 가은이었다.
그리고 가은은 모르고 있었지만,
얇은 새시 문을 사이에 두고, 라파엘 역시 집주인 아주머니와 가은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잠든 지 한 시간 후쯤, 라파엘은 깨어났다.
라파엘 자신의 자연치유력으로 이제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짧은 시간이지만, TV를 통해 이곳의 삶의 방식 또한 알 수 있었다.
수능을 한 달 앞둔 고3처럼, 라파엘은 채널을 바꿔가며 빨아들일 듯 TV를 시청했다.
드라마, 요리, 여행, 영화, 성인, 다큐멘터리….
채널은 참으로 다양했고, 라파엘 자신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 장면만 보아도 그 전과 후의 스토리며 영상들이 모두 머릿속에 들어와
막힘없이 이해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가은이 왜 우는지도, 알 수 있었다.
‘돈이구나. 가은씨는 돈 때문에 염려하고 있어.
여기선,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구할 수가 없으니까.
한 달이라, 가은씨는 자신의 힘으로 한 달 안에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여길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먹먹하게, 라파엘의 가슴이 아파왔다.
이심전심, (以心傳心) 지금 가은이 떠올리고 있는 부모님의 죽음과
그 이후의 힘든 시간들이, 여과 없이 라파엘에게 전해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라파엘의 눈동자가, 다시 보라색으로 변했다.
한동안 소리죽여 울던 가은은, 눈물을 닦고 심호흡을 했다.
안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라파엘이,
자신이 돌보아주어야 할 백치 같은 사람이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다시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히……. ^-^”
가은은 억지로 한번 크게 웃으며 표정을 바꾸고, 현관문을 열었다.
“앗, 라파엘? 일어났어요?”
가은의 웃는 얼굴을 본 라파엘은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의 슬픔을 그에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라파엘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걱정을 하면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한다는 것을 아는 그녀다.
“음? 근데, 이게 무슨 냄새에요?
헉! 당신 설마, 요리 한 거예요?”
“냉장고 안에 고등어가 있기에 무를 넣고 고등어조림을 만들었어요.
TV에선 붉은 고추를 넣던데 그건 안보여서 못 넣었어요. 미안해요.”
그가 다시, 천사처럼 웃는다.
아까까지 처음 죽을 먹어본다며 놀라던 사람이,
그녀가 없는 사이 고등어조림을 만들어놓고 고추를 넣지 못했다며 미안해하고 있다.
이 남자, 대체 언제까지 가은을 놀랠 속셈인 걸까?
“방에 가서 앉아 있어요. 이번엔 내가 가은씨를 대접할 테니까.”
라파엘이 가은의 손을 잡아 방으로 이끌었다.
찰라였지만, 가은은 그 손을 통해 라파엘이 변했음을 알았다.
이미 라파엘은, 어젯밤의 그 가랑잎 같던 남자가 아니다.
그 손은, 그 손에 주어진 힘은, 분명 건장한 이십대 남자의 것이었다.
방안에 앉아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는 가은은 어쩐지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자, 가은씨, 먹어봐요. 가은씨가 만든 죽만큼 맛있진 않겠지만….”
수줍게 웃으며, 라파엘이 작은 냄비를 가은이 앉은 쪽으로 밀었다.
“그럼, 어디….”
라파엘이 만든 고등어조림은, 마치 TV 속 요리 연구가의 것 같았다.
분명 냉동실에 있던 오래 된 고등어일 텐데,
어쩌면 이렇게 살이 탄탄하고 반지르르 윤기가 돌까?
얼른 고등어 한 점을 떼어 입에 넣은 가은은 탄성을 질렀다.
“와! 너무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날 위해서 누군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는 거, 꼭 3년만이에요….”
가은은 끝내,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보이고 만다.
그런 가은을 바라보던 라파엘은 상을 뒤로 조금 밀고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울지 말아요. 이제 내가 있잖아요.
내가 매일매일, 가은씨를 위해 요리해 줄게요.
그러니까 이젠, 혼자 울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는 라파엘의 보라색 눈동자에도,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히, 미안해요. 밥 먹다가 내가 무슨 짓이람.”
라파엘의 품안에서 한동안 소리죽여 흐느끼던 가은이, 눈물을 닦고 씩 웃으며 말했다.
가은의 두 뺨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리지만,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구나.’
라파엘은 토끼눈을 하고 웃는 가은을 보며 생각했다.
“어서 밥 먹어요. 모처럼 먹는 맛있는 밥 나 때문에 다 식겠네.”
가은은 다시 웃으며 한 숟갈 가득, 하얀 밥을 떠올린다.
*
세양의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식사를 끝내고,
라파엘이 하겠다는 걸 가은이 고집을 피워 함께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사과를 깎는 가은에게, 라파엘이 말했다.
“어제 내가 쓰러져 있었다는 곳, 다시 가보고 싶어요.
아까 꿈을 꾸었는데, 분명 여기와는 다른 곳이었어요. 뭔가 기억이 날 것도 같아요.”
“그래요? 와, 잘 됐다. 어서 가 봐요.
참! 이거…. 잊어버리고 있었네. 라파엘 옷을 샀어요. 내 옷은, 당신에게 너무 작잖아요.”
쇼핑백을 건네며, 드러난 라파엘의 손목과 발목을 바라보던 가은은 다시 웃었다.
별일 아닌 것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웃게 된다.
“와, 선물이에요? 나 선물 처음 받아 봐요.”
쇼핑백을 열어보는 라파엘의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반짝였다.
마치,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난 후 햇살을 반기는 6월의 미루나무 잎사귀들처럼….
가은은 또다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와, 정말 이뻐요. 가은씨, 정말 기쁘고 신나요.”
스웨터며 바지를 손에 든 라파엘은 금방이라도 펄쩍펄쩍 뛰어오를 듯 기뻐한다.
“비싼 것도 아닌데요, 뭘….”
“아니에요. 나한텐 이 행성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옷이에요.”
‘이 행성…?’
그의 말이 조금 이상했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라파엘을 바라보는 가은은 기뻤다.
조금 전의 절망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입어 봐요. 난 주방에 가 있을게요.”
방문을 나서며 가은이 말했다.
“다 입었어요?”
잠시 후, 가은이 물었다.
“네, 가은씨. 어서 들어와요.”
그의 목소리에선 금방이라도 새파란 물방울이 튀어오를 것만 같다.
“어머!”
방문을 연 가은은, 새 옷을 입은 라파엘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하얀 셔츠와 스웨터, 그리고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라파엘의 모습은 너무나 근사했다.
마치, 아이비리그 광고 카탈로그 속의 남자모델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보다 훨씬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굽슬거리며
라파엘의 하얀 이마를 덮고 있다.
“가은씨가 사 준 옷, 너무너무 좋아요. 참 편안하고 따뜻해요.
마음에 꼭 들어요. 정말 고마워요.”
라파엘은 가은은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기쁨에 넘쳐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넋놓고 바라보던 가은은, 순간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얼른 몸을 빼려던 가은은, 생각을 바꿔 가만히 그에게 안긴 채 서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러듯이,
이것은 정말 아무런 사심이 없는 기쁨과 감사의 표현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므로.
‘아니에요. 당신은 나한테 훨씬 더 큰 기쁨을 준 걸요.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와 줘서, 나야말로 정말 고마워요.’
눈을 감으며, 가은은 속으로 속삭였다.
넓고 따뜻한 그의 품은, 치자꽃 향기 가득한 6월의 정원을 떠올리게 했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가은은 생각했다.
그가 입은 하얀 스웨터의 보푸라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살며시 팔을 뻗어 그를 마주 안으며 가은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 외국인이건, 아니면 정말로 외계인이건,
그건 아무 상관없어.
내겐 그 누구도 아닌, 라파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