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정치적 지향이 가장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대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즉, 서로 말을 할 때 누군가가 존대말을 한다면 그 대화 상대방들은 모두 존대말을 하는 것이고, 말을 놓게 된다면 모두가 같이 말을 놓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에서의 미시적 평등이다.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가 서로의 자유로운 사유와 대화를 방해할 수 있기에, 대화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되도록 같아야 한다고 본다. 즉, 평등의 관점과 자유의 관점 모두에서 보았을 때, 소위, "말을 놓는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지극히 타당하다.
ㅇㅅ군 같은 경우는 방금 말한 논지를 확장시켜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는 서로 편한 말을 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10살차이가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10살 차이가 넘는다 하더라도 서로간의 거리낌이 없다면 말을 놓는 것이 타당하다. 나이의 차이라는 것은, 곧 경험과 지식의 차이를 뜻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존대말의 정당성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차이를 존중하는 이의 "존중"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 존중은, 바로 "경험과 지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대해서 존중하고 존경을 표한다면, 그 자신또한 마땅히 그 존중과 존경을 표하는 이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가?
처음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대화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데에서 시작한다. 즉, 모르는 사람끼리의 존중은 당연하며, 그래서 서로 말을 높인다. 그러나 나이 혹은 학번 차이가 밝혀지자, 현실에서는 한 명만이 말을 계속 높이고, 한명은 말을 낮춘다. 언어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존경"에 대한 고마움은 "친밀한 반말"인 것일까. 사실 아니지 않은가? 나이 혹은 학번 차이로 인해 말하는 언어에 차이가 생길 때, 우월한 위치의 인간이 말하는 언어의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학번이나 나이를 가르키는 숫자가 상대보다 낮거나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경험이나 지식이라는 인간의 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는 별로 하등의 상관이 없는 "숫자"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어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것이 현재의 우리 모습이다.
이런 차이는 사실, 오래된 전통이 아니다. 심지어 나이가 같거나 혹은, 나이가 더 높음에도 "학번"을 통해(숫자 한 두개 차이마저도) 수직적 언어질서를 공고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우리들의 "80년대"일게다. 물론, 그 이전에 군사독재정권의 군사문화, 군대등이 강요했던 그 문화의 역할이 전체 민중에게는 더 컸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2007년 현재의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세대는 어쨌든 그 시절에 대학을 다닌 세대이다. 현 시대의 주류들인 것이다. 변혁을 노래하고 투쟁을 외쳤던 그들은 그 수직적 언어질서를 더욱 공고화시키지 않았던가?
간단하다. "학번"을 통한 군림은 선배가 후배에게 쉽게 우월적 위치를 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미묘한 쾌감과 함께, 선배는 후배에게 "필요한 것"을 더욱 쉽게 "학습"시킬 수 있다. 그 학습의 주된 내용은 인간해방과 노동해방, 평등을 노래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그걸 "학습"시키는 선배는 후배에게 그들간에 미시적 언어질서에서 철저히 불평등과 종속의 단맛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아래학번 후배가 윗 선배에게 정정당당히 토론하고 대들 수 있던 문화가 있었는데, 그런 문화는 점점 사라져버렸다. 선배는 여전히 후배를 "학습"시켰다.
90년대 이후, 이른바 "열사정국"과 엔엘과 야당, 재야 등등의 뻘짓으로 학생운동의 열기가 식어갈 때 마저도, 그리고 마침내는 "학습"이란 것이 필수가 아니라 일부 얼빵한 후배들에 대한 선택형이 되었을 때 마저도, 그놈의 학번, 선후배간의 소위 "예의"라는 것은 강하게,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천재는 사라지고 천재에 대한 숭배만이 남아있듯이, 학습과 토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예절"이 남아있었다. "선후배 위계로서의"
나는 지금 대학사회내의 전반적인 "학번 중시 문화" 혹은 "위아래 수직적 위계"가 강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바로는, 소위 "진보"와 "평등"과 "변혁"을 이야기하는 작자들일 수록, 그런 학번문화와 예절을 더욱 많이 따지고, 후배 혹은 나이 어린 이들에 대한 반말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소중한 가치들과 별반 관계없고 생각없는 자들은 자유롭게 친소의 여부에 따라 서로의 언어를 편하게 일치시키는데 유연하다.
소위 "조선시대 예절"에서 철저히 위아래를 나눴던 것의 연배차이는 10살이상이었다.-_- 물론, 그러함에도 퇴계는 고봉에게 26살이나 되는 나이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존대했다. 물론 나는 지금 만인이 모두 공대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높임말을 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은 있으되 친밀은 없는 것이다.(퇴계와 고봉의 사이는 단순한 선후배나 친구지간이 아니기 때문에 친밀이 없어서 서로 존대했다는 것이 아님)다만,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은 서로의 친밀함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언어의 사용은 평등함과 존중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동일하지 못한 언어의 사용은 곧 불평등한 관계속에서의 권력관계를 상징한다. 즉, 선배는 후배에게 미시적으로 "권력을 갖는다." 우스운 일이다. 학교 몇년 일찍 왔다고, 혹은 나이 몇살 먹었다고 한 인간에 대한 권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홍명희와 그의 아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ㅡ 홍명희와 아들의 나이차이는 18살이었고, 홍명희의 어느 한 친구는 홍명희보다 9살 어렸고, 홍명희 아들보다 9살 많았다. 즉, 홍명희의 친구는 홍명희 아들의 친구였다.-_-.. ㅡ 작금의 우리 문화는 저급하다. 혹은 불평등의 극치. 전근대적이다.
하물며 한 학번 차이, 2학번 차이나면서 나이가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리거나 한 두살 많은 것으로 내가 존대말을 강요당하거나, 혹은 내가 반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존대말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난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작용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두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싶고,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가 예절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예절과 언어의 차이는 별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차등적인 언어질서를 추구해야하는 이들과는 일정정도 이상 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들과는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나이가 같으면서도, 혹은 한 두살 차이에 학번을 통해 내게 군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과 친해지기에는, 나의 위선은 부족하다. 그래 그거야 좋다. 생각의 차이야 있는 것이고, 그런 이들과는 그저 그렇게 적당한 위선과 가식으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적당히 존대말하면서 그들의 반말을 애써 삭히며.
다만 작금에 이르러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2가지이다. 어째서 후배들은 내가 말을 놓으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을 놓지 못하는가. 미시권력에 대한 엄청난 내면화. 내가 섬뜩하게 느끼는 것은, 그렇게 선후배관계에 대해서 싹싹한 애들은 앞으로 들어올 08, 09애들한테 그들이 나에게 했던 존대를 그들에게 강요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가장 심각한 폭력은 내가 07들에게 말을 놓으라고 하는 것을 만류하는 사람들의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들이다. 나는 평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진보를 믿는 사람이다. 변혁을 믿고, 인간의 해방을 추구한다. 거시담론에서의 해방을 말하면서, 정작 내 주변의 해방과 평등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추구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보이며 좌파인가? 난 그런 나 자신에게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낀다. 실천하지 않는 이에게 오류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곧 영원한 오류이다. 난 그 영원한 오류를 거부하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너만 생각하지 말고 주변을 생각하라"느니, "현실은 어쩔 수 없다."라느니 한다. 난 앞으로도 굴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함에도 그것은 내게 폭력으로 다가온다. 내 신념에 대한. 사상전향서를 강요당하는 비전향 장기수의 느낌처럼, 나는 또한 "말을 놓으라고 하지 마라"라는 강요를 듣고 만다. 다툼과 갈등과 범죄가 많은 사회는 그만큼 법규와 규범이 빡빡해서이다. 유연한 사회일수록, 관용의 정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다툼과 갈등은 적다. 언어를 자유와 평등의 개념에서 접근하면 그것은 예절과는 무관하다. 예학은 관계의 올바른 형성을 추구하는 것이지, 위아래가 목적인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번 학기에 유가철학을 듣고 있는 바로는. 예학이 위계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 그것은 그저 폭력이다. 야만이다.
너머인가 머시기인가 하는 곳에서 허구헌날 공개세미나 주제로 하는 민족 어쩌구에서 하는 말 있지 않은가. 양반과 상놈, 귀족과 백성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그리고 그들의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기에 동일한 민족의식을 안 갖고 있었다고 우리민족이.
우리는 같다. 그럼에도 언어는 같지 않다. 소위, "공동체"라는 느낌은 선후배로 끈끈히 엮인 같은 학부생, 학교출신 정도의 느낌이지, 그것에 평등은 배제되어 있다. 옛날에도 그랬다. 공동체, 같은 민족이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은 배제되어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발전이 없는 셈이다. 혹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