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도 정이 있느냐. 있고 말고다.
나는 소년 시절 내가 친구로 삼았던 몇마리의 개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집 잘 지키고, 주인에게 유순했던,
그러다가 결국은 보신탕 집으로 끌려가 버린
그 비통의 충복들을.
어머니는 섭섭해하시면서도
그것들을 팔아치운 뒤 양은 그릇들을 사곤 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엔
보신탕이 되어버린 한 식구에 관한 것보다
새로 찬장 속에 정돈된 그릇들을
더욱 소중히 하셨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어머니에 대해
나는 원망을 품곤 하였다.
나는 잊을 수 없었다.
끌려가지 않을려던 내 친구의 애처로운 버팀,
그리고 울음이며, 원망이며, 불안으로 가득하던 그 얼굴을.
그러하다.
팔려간 날 밤, 20리길을 헐떡이며 다시 내 집으로 돌아온
개의 홀쭉한 뱃가죽과
반가움으로 미친 듯 꼬리를 흔들며 내 몸에 얼굴을 비비던
그 말못하는 짐승의 질기고 눈물겨운 정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잊을 수 없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시간까지의 병이다.
우리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참다운 병이다.
그 병은 작별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작별이 얼마나 흔해빠진 유행인지를.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작별하지 않고도 견디며 사는 방법을.
다정도 병인 듯하여 잠 못들던 우리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무디어졌다.
작별하면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정도로
덤덤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리의 개를 팔아치우고
필요하면 또 다른 개를 사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배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흥정된 한마리의 개가 아니다.
아니 흥정된 한마리의 개여도 좋다.
그대들의 목을 맨 사슬을 끊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혹한의 겨울밤
칼날 같은 바람을 헤치고
다시금 그리운 이에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 흥정된 한마리의 개인들 어떤가.
그러나 참 이상도 하지.
나는 최근의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쉽게 차버리고 갈아 치우고 하는지 도대체 알 수 가 없다.
작별 뒤에 독배처럼 괴로운 시간을 마시며
머리카악을 집어 뜯지 못하는지 알 수 가 없다.
재빨리 체념해 버리는 방법을 배운 탓일까, 아니면
너무 쉽게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탓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우리 집 식구들 먹다 남은 밥으로 기르던
개만큼의 정조차 없는 탓일까.
서로 사랑을 배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작별하지 말라.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더러는 작별도 해볼 것.
그러나,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 것.
그리고 우리는
사랑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경멸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내 잠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