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하면 금정산성이 생각나고 그 산성의 성돌을 따라 동문에서 남문으로, 동문에서 북문으로 걸었던 추억들 생생하실 겁니다. 물론 사진 한 장들 집에 보관하고 계시겠죠. 그 산성 마을에서 먹던 막걸리와 염소 고기는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서 부산의 음식 자랑 거리가 되지요.
금정산 등반을 하다 보면 “여기서 임진왜란 때 송상현 부사가 왜놈들과 싸웠던 곳 아니가.” “잘 봐라. 이 돌들이 그때 전쟁을 치를 때 얼마나 고생했겠노?”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고, 누구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을 만나면 ‘그 양반 참으로 아는 것도 많네.’ 하고는 수긍했었지요.
그런데 이럴 어쩌나 이 산성은 임진왜란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요. 임진왜란은 동래읍성에서 치른 전투랍니다. 지금의 동래읍성 축제가 열리는 복천박물관 근처지요. 이 산성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으로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이 된 산성이랍니다.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 우리 조정에서 그 전에 있던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성이 완성된 것이랍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금정산에 대하여 공부할 때 다시 다루겠습니다.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버렸습니다. 본격적으로 범어사에 들어가서 공부해보겠습니다.
부산의 오래된 절이라면 여러분은 어디를 꼽을 수 있나요? 범어사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라면 부산 사람 맞습니다. 그러나 연산동에 사시는 분들은 마하사라고 말해도 좋겠고, 서면 근처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선암사를 꼽아도 좋겠죠.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범어사를 빼고는 부산의 사찰을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지요. 그만큼 범어사는 부산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사찰이지요.
범어사를 찾아가는 길은 부산의 드라이브 1번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상쾌한 도로랍니다. 이 길을 따라 차를 몰고 가보신 분들이라면 이렇게 부처님 나라를 오르는 길이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은 없다는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그만큼 빼어난 절경에 범어사가 자리하고 있으니 부산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찾는 절이 되었지요. 이렇게 사시사철 맑고 푸른 숲길을 따라 금정산으로 오르면 산의 중간쯤에 범어사가 나온답니다.
‘梵魚寺’ 쉽지 않은 한자입니다. 해석하자면 ‘범천의 고기 절’이란 듯이네요. 절 이름을 몰라서야 어디 魚山橋(어산교)마저 넘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범어사의 창건 설화부터 알아봐야겠지요.
범어사는 당 문종 태화 19년 을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되었다.
일찍이 해동의 왜인이 10만 병선을 거느리고 동해안에 이르러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여 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문득 꿈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대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소서, 태백산에 의상이라는 스님이 계시는데 진실로 金山寶蓋如來(금산보개여래)의 제 7후신입니다. 항상 성중 1천, 범중 1천, 귀중 1천, 모두 모두 3천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을 연설하며 화엄신중과 40법체, 제신 및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따라 다닙니다.
또 동쪽 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는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어 항상 금색으로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고 마르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범천(梵天)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가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이하여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칠일동안 밤낮으로 화엄신중(화엄신중)을 독송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금색신)으로 화현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색신으로 화현할 것이며 또 비로자나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할 것입니다.
보현, 문수, 향화동자 등 40 법체와 제신과 천왕을 거느리고 동해를 위압하게 되어 왜병이 자연히 물러 갈 것입니다. 만약 후대에 훌륭한 법사가 출현하여 계속 이어가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침입하게 되어 사방에서 병란이 끊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금정암 밑에서 화엄정진이 계속 이어지도록 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라 하고서 신인은 곧 사라졌다.
왕이 놀라 깨어놨고, 아침이 되자 아침이 되자 제신들을 불러 모아 꿈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오게 했다. 의상과 함께 금정산에 가서 칠일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독경했다. 이에 땅이 진동하면서 홀연히 제불, 천왕, 신중, 그리고 문수, 동자 등이 각각 나타나 모두 병기를 가지고 동해에 임하여 적을 토벌하니 혹은 활을 쏘고 혹은 창을 휘두르며 혹은 모래와 돌이 비처럼 휘날렸다. 또한 바람을 주관하는 신은 부채로 흑풍을 일으키니 병화가 하늘에 넘치고 파도가 땅을 흔들었다. 이에 왜선이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의상을 봉해서 銳公大師(예공대사)로 삼으니, 이것이 곧 꿈의 영험이었다. 이로서 금정산 아래에 범어사가 창건되었다. <범어사창건사적> 중에서/조선조 숙종 26년(1700) 동계 스님>
범어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되지요.
우선 의상 스님은 흥덕왕 보다는 앞 시대의 사람이니 범어사의 창건에 의상 스님과 흥덕왕이 같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 18년(678년)에 창건되었다는 것을 통설로 믿으면 좋겠습니다. 그땐 의상 스님이 살아계실 때니까요. 흥덕왕이 창건설화에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 시기에 크게 중창을 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답니다.
또 범어사의 창건과 왜적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 당시에 왜적의 횡포가 심하였고, 이럴 국가적인 결집력을 동원하여 물리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범어사를 창건하여 부처님의 법력으로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나타나는 것이랍니다. 이는 고려시대 몽고가 쳐들어 왔을 때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몽고를 물리쳐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담았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랍니다.
이렇게 나라의 어려운 일이나 나쁜 기운을 물리칠 자리에 세운 절을 裨補寺刹(비보사찰)이라고 하지요. 황룡사를 세워서 주변의 적들을 물리치려 했던 것도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앞에서 부산의 鎭山(진산)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진산이라는 뜻도 그 고을에 나쁜 기운이 스며들지 못하게 또는 난리가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 산들은 주요 도시들마다 다 있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울(북한산), 대구(팔공산), 대전(계룡산), 광주(무등산) 같은 개념입니다.
창건 당시엔 규모는 대단히 커서, 彌勒殿(미륵전), 大藏殿(대장전), 毘盧殿(비로전), 天王神殿(천왕신전), 流星殿(유성전), 鐘樓(종루), 食堂(식당), 講殿(강전), 沐浴院(목욕원), 鐵幢(철당-철당간) 등이 별처럼 늘어지고 寮舍(요사-스님들 기거하는 방) 360방이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로서 명실상부한 국가의 대 명찰이 되었답니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크고 웅장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전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국방상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게 된 범어사는 그 절 이름이 유래하게 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山頂(산정)에 돌이 있어 높이가 3장(丈)가량이다.
그 위에 샘이 있는데 둘레가 10여척이고 깊이가 7촌(村)가량으로 물이 늘차 있어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색이 황금과 같다.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金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
<동국여지승람. 동래부지의 동래현 산천조>
범어사가 어디에서 온 이름인지 이제야 해답을 얻었습니까? 범천이란 곧 하늘이니 여기는 부처님 나라지요. 여기 범천에서 내려온 물고기(梵天의 물고기라고 梵魚랍니다.)가 금빛 나는 샘(金井-곧 금샘입니다. 금샘초등학교는 정말 좋겠다. 여기 金井에서 금정구가 탄생했지요.)에서 놀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 梵魚寺가 된 것이랍니다.
범어사를 들어서는 초입에 魚山橋(어산교) 다리가 있답니다. 여느 절이라도 절 입구는 물길이 있고 이 물길을 건너게 하는 다리들이 있지요.
선암사의 승선교는 그 아름다움으로 이름을 날리는 다리지요. 이렇게 절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다리는 곧 속세와 부처님 나라를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답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리를 건너 부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니 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속세의 인연일랑 끊고 부처님에게 귀의하겠다는 마음이면 더욱 좋겠지요.
어산교 근처의 소나무(魚山老松)는 금정8경에 속하는 절경이랍니다. 다음에 금정산을 공부할 때 범어3기와 금정8경을 중심으로 궁부해보겠습니다만, 여기 魚山老松(어산노송)은 금정8경의 하나랍니다. 길 양편으로 울창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어 한층 산사(山寺)의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는데 여기 어산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지요.
조선시대 낙안 스님이란 분이 계셨답니다.
낙안 스님은 흔히 浪伯首座(낭백수좌) 혹은 萬行首座(만행수좌)라고 불렀답니다. 일찍이 범어사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布施行(보시행)을 발원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하여 이바지하였답니다.
스님의 보시행은 八松(팔송) 근처에 나무를 심고 우물을 파서 행인들의 고통을 들어준 일, 기장의 칼치재 근처에 오두막을 얽고 짚신을 삼아 지나가는 행인에게 보시한 것이라든지, 동래 온천 부근의 큰길가에서 동편 산록에 외밭을 가꾸어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답니다.
이처럼 일생을 남을 위해 보시하시던 스님은 마지막 늙은 몸뚱이라도 보시하고자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3일 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혔다고 합니다.
스님에게서 특기할 만한 일은 커다란 원력을 세워서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원력을 이룩하였단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 있지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排佛崇儒(배불숭유-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의 폐해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불교의 박해는 그 극에 달하였는데,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사찰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가 무려 30종에서 40종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답니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산성을 쌓거나 지키는 일도 맡았지요. 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36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당시의 스님들은 자신들의 공부나 정진에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지요.
낙안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시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답니다. 설사 이번 생에 안 되면 다음 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원력을 세웠답니다.
"금생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얼마나 관리들이 불교를 억압했으면 이런 다짐을 했을까요.) 그리고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하고 그 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짓기 시작하였답니다.
스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숙명통(宿命通)을 못하였으므로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남겨 놓기로 하였지요. 첫째가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데(지금도 일주문 근처에는 下馬碑(하마비)가 있답니다. 여기까지 관리들이 말을 타고 절에 들어왔다는 증거지요.
오죽하면 여기서는 말에서 내려 절에 들어오라고 이렇게 하마비를 세웠을까요.) 자신은 절 입구인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으며, 둘째는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 셋째는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 라는 것이었답니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비슷한 연배의 스님들도 다 돌아가시고, 그 제자되는 스님들도 이미 늙었으나 낙안 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
巡相國(순상국)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스님들은 언제나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엎드려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반드시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리더랍니다. 그리고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낙안 스님의 방 앞에 와서는 기어이 문을 열라하여 봉함을 뜯고 열어보니, 開門者是閉門人(개문자시폐문인)이란 스님의 친필유묵이 몇 십 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지요.
그리고 주지 스님의 차대접을 받으면서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하였다고 전합니다.
그 증거로써 지금 어산교에서 500∼600m 정도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몇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巡相國趙公嚴革袪寺弊永世不忘壇(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이라는 비가 있답니다.
순상국 조공이 낙안 스님의 후신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모두들 낙안 스님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지요.
어산교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어산교 조금 위 소나무 숲에는 당간지주 한 쌍이 떡 버티고 서 있는데, 당간지주란 여기가 범어사라는 표시를 한, 학교로 치면 국기게양대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멀리서 펄럭이는 범어사 표시 깃발을 따라 올라 가다보면 절에 도착하게 되지요. 그러니 당간지주는 절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절집 가운데 마당에 기둥이 보이는데 이걸 당간지주라고 하면 곤란하답니다. 이건 掛佛石柱(괘불석주)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괘불석주란 ‘掛佛’ 즉 ‘불화를 걸다는 뜻’과 ‘石柱’는 불화를 거는 돌기둥이란 뜻이지요. 대웅전 안에서 많은 사람이 법회를 하기에 곤란할 경우에는 절 마당에 부처님 큰 그림을 걸어놓고 야외에서 큰 법회를 열었답니다. 일생동안 이렇게 큰 부처님 그림을 몇 번만 보아도 극락에 간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런 곳만 골라서 열심히 찾아다니는 신도들도 많답니다. 이런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리다보니 자연 법회는 시끄럽고 소란스럽겠지요. 그러니 이런 법회에서 나온 말이 野壇法席(야단법석)이랍니다. 원래의 뜻은 ‘야외에서 하는 법회’란 의민데 이게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때 야단법석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와전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도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걸 야단법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원래는 좋은 뜻이었는데 말입니다.
이젠 당간지주와 괘불석주를 구별할 수 있겠는지요. 범어사 삼층석탑 근처엔 괘불석주가 있고 거기에 높이 쇠기둥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음주 향토기행은 일주문을 거쳐 종루까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