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진보”라는 것은 가능한가?

유성민 |2007.04.11 01:26
조회 32 |추천 0

 이 책을 다 읽고 생각난 것들이 있다. 홍세화와 더불어, 진중권과 임지현, 그리고 니체.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진중권의 가 생각났고, 임지현과 그 외 사람들이 쓴 글을 엮은 , 니체의 “위버멘쉬”가 생각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니체가 생각난 것은, 바로 이 책을 읽고 특유의 허무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게 한 것을 그나마 자신에게 위안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홍세화가 그렇게 강조한 “똘레랑스”와 “사회정의”의 나라라고, 이 책에서 이야기된 프랑스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파 내무장관 니콜라 사르코지는 소위 “3등 국민들의 소요”, 즉 프랑스 빈민들(주로 흑인, 알제리 등의 프랑스 식민지인들)의 소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허접쓰레기들은 지겹다. 우리가 청소하겠다.” “소요장소가 지저분해졌으니 고압세척기로 오물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것은 한 언론인의 악의적인 편집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사르코지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도된 이후에 사르코지에 대한 지지율은 10퍼센트 포인트 이상 상승한 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문제다. 내무장관이면서, 자기 나라의 분명한 국민들에게 “폭도”, “깡패”, “시골뜨기”라고 이야기하며 단호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다. 홍세화가 프랑스에서 살아있다고 강조한 “똘레랑스”와 “사회정의”에 따르면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프랑스 인민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 과거 식민지인들을 제국주의 원리 하에 착취하고 탄압한 이들은 누구인가? 알제리에서의 그 엄청난 폭력행위들은 누구에 의해 자행되었는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은 왜, 무슨 배경으로 쓰여 졌단 말인가? 그럼에도 현재 프랑스 땅에 와서 살고 있는 “회교도” “식민지 출신 국민들”은 왜 지금까지도 3등 국민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사회정의상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똘레랑스를 위하여, 니콜라 사르코지는 철저한 “앵똘레랑스”로 단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의 “사일런트 마이노리티”는 사르코지에 대해서 강력한 지지를 보내주었다. 과연 이러한, 홍세화가 책을 통하여 “한국이 배워야 할” 나라로 이야기한 프랑스가 우리가 배워야할 나라란 말인가? 과연 이 책이 이야기하는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와 사회정의, 토론의 문화는 그 땅에서 얼마나 살아있단 말인가? 홍세화는 프랑스 사회의 이면을 지적하긴 하지만 그것을 부수적인 요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은 단순히 표피적인 프랑스의 모습을 거대하고 어두운 이면을 가리는 역할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홍세화는 그랑제꼴을 이야기하지만, 그 그랑제꼴이 바로 홍세화가 다른 책들에서 이야기한 “대학평준화”와 바칼로레아 시험의 이면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그랑제꼴에서 행하고 있는 “환영식”의 문제를 성토하는 데 부차적으로 말할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고등교육체계는 평준화된 대학들과, 분야별 엘리트인 그랑제꼴 제도로 갖춰져 있다. 바칼로레아 시험에서 합격한 학생들은 1년 동안 그랑제꼴 예비반에 들어간다. 이 인원이 연 5~6만 명 정도다. 즉, 우리나라의 학벌 카스트를 형성하는 사람의 숫자와 대동소이하다. 더구나 우리의 KS마크, 즉 경기고 - 서울대 코스가 최고의 엘리트로 취급되는 것과 비슷하게, 프랑스에서도 “국립행정대학원(ENA)”을 나와야 주요한 정치인 - 총리 내지 대통령 -이 될 수 있는 보수적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홍세화는 이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재 국립행정대학원을 나오지 않고 대통령이 된 인물은 전무하며,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만약 세골렌 루아얄이 (여당 전당대회에서 98.1퍼센트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 니콜라 사르코지를 누르고 당선된다면, 그가 아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최초의 非 국립행정대학원 출신 대통령이 될 것이다. 프랑스 또한 우리 사회 못지않게 보수적인 사회인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 장 마리 르펜과 국민전선의 지지율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혹자는 2006년의 프랑스에서 일어난 CPE투쟁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우파 대통령과 우파 총리의 고용계약 개악안을 민중들의 투쟁으로 저지시킨 프랑스의 “사회정의”에 대한 집념을 보지 못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이 책에서 나온 “트럭 운전사들이 정년을 60세에서 55세로 줄여달라고 했다.”라고 한 사례와도 맥을 같이 하는 프랑스인들의 높은 사회의식의 반증일 것이다. 그러나 그 높은 사회의식은 “우리 프랑스인들”에 국한될 뿐이지, 그들과 다른 존재들, 구체적으로는 무슬림과 식민지 출신에 대한 사회정의 의식과 똘레랑스까지 넓혀지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의식은 어디까지나 일부가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똘레랑스의 정신은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다. 우리는 우리들과 노동자 서민 대중을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똘레랑스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노동자 서민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개악안이 그들 스스로의 문제이기 때문에 행동에 나선 것이다. 진정 ‘다른 것’에 대한 연대가 프랑스 전체의 현상인가? 난 회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하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난 홍세화의 이 책을 탐탁해 하지 못한다.  홍세화는 똘레랑스와 사회정의, 얼핏 보면 정말 실천해야하고 옳은 당위적인 이야기, 그리고 우리 한국이 턱없이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관하여 비판하면서 실천을 설득한다. 그의 주장들은 분명히 옳다. 하지만 당장 그 “프랑스 사회”조차도 그런 모습을 제대로 보이고 있지 못하고 외려 한국의 현재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래서는 쓴 웃음만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한국은 질서가 중요하며, “똘레랑스”가 아닌 철저한 “불관용”의 사회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것”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통찰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구한 말 이래 일그러진 근대화, 우승열패의 신화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심해졌고, 독재치하를 거치면서 토론과 합의는 거의 실종되고, “다른 것”은 빨갱이로 매도당했다. 심지어는 권위주의 독재 치하에 맞서던 진보와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권들조차도 자기주장의 옳음을 이야기할 뿐, 그 속에는 설득함, 혹은 설득 당함(합리적 토론에는 설득 당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이 없었다. 그것은 NL과 PD와 그 외 여러 정파들의 분열을 낳았고, 그것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NL의 이론은 북한의 주사파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더욱 한국좌파의 토양을 오염시켰다. 이런 상황은 지금의 한미FTA 정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농업과 제약 빼고 우리가 손해 보는 게 뭐냐?”라고 물어봤다. 그 외에도 많은 독소조항들이 있는 것들이 사실이므로, 대통령의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 외에도 손해 보는 것은 투자자 정부제소권을 비롯해, 널려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왜 “농업과 제약”관련 종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를 찬성해야 하는가? 그쪽 분야 종사자들은 우리와 같은 국민들이 아닌가? 이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버리면, 그 다른 이들과 연대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인들의 “남의 일이니까 신경 꺼.”가 적용된다. 남의 일에 관하여 걱정하고 연대하고 정부의 협상에 대해서 반대하고 토론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에 대해서 사람들은 말한다. “빨갱이들, 어린 대학생 놈들이 넘들 선동해서 교통 혼잡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한다.”고 말이다.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질서를 중시하고, 똘레랑스를 실천하려는 이들에 대해서 철저한 불관용으로 일관하는 것, 바로 현재 한국의 모습이다. 문제는 이런 것을 비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비판의 준거로 삼은 프랑스가 내가 보기엔 한국과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책보다는 차라리 임지현이 엮은 을 통해 “질서”란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을 갖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지독하리만큼 내재된 규율권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은 사실은 우리의 일그러진 근현대사 때문이다. 이런 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책으로 홍세화의 이 책은 다소 부족하다. 그리고 를 통해 현재의 한국인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 쉽고 신랄하게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홍세화의 이 책을 비롯하여, 홍세화의 저술들은 언제나 당위적이고 올바른 원론을 공자님 말씀하듯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원론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홍세화의 주장은 유효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주된 근거이자 그가 가진 “전매특허”로 작용하는 프랑스는 현재 분명 “흔들리고 있다.” 바로 그가 강조하는 똘레랑스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말이다. 프랑스의 토론문화는 첨예하다. 그렇지만 첨예한 토론의 담론 자체가 얼마나 다원화되었는가? 얼마나 포괄적인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담론의 포괄성과 다원성이야말로 나와 “다름”을 똘레랑스하고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는 근본이기에 이 회의는 근본적이다.


 황우석이 난자매매를 하건, 논문조작을 하건 어떤 부도덕한 짓을 하건 한국인들에게는 오로지 돈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통한 민족의 자존심이 중요하다. 이것 또한 결국은, 우리가 얕잡아 봤던 일본에 착취당했던 일그러진 근현대사, 그리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생되었던 “우승열패의 신화” 때문이다. 그리고 독재치하에서 내부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강요했던 어두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한국에 왔던 2002년에는 그렇게도 질서와 도덕을 잘 지키던 한국인들은 2006년 거리응원이 끝난 이후에는 왜 그토록 난장판이 되도록 4년 만에 시민의식이 형편없어졌는가? 는 이를 신랄하고 간단하고 명징하게 정리한다. “한국인들은 시민의식도 남을 위해 갖는다. 진정한 주체적 윤리의식이 한국인들에게는 없다.” 황우석이 돈을 버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만방에 떨치기 위해”그가 뭘 어떻게 하건 관심이 없고, 외국인들이 자기를 보면 우리는 누구나 “민간 대사”가 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한 주체적 윤리와 도덕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것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토론을 요구하면, 저 “빨갱이 매국노”(실제 황우석 사태 때 이런 신조어가 만들어졌었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훌륭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러나 반면 홍세화의 책은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 한국과 프랑스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인 성찰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난 회의적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상황은 둘 다 긍정적이지 못하다. 낙관적 이기는커녕, 비관적이다. 사실, 그래서 난 니체가 생각났다. 니체의 “영겁회귀”, 그리고 “위버멘쉬”. 홍세화의 담론은 옳다. 그러나 이 치열한 현실에서 그런 말들은 공허해지기 십상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의 진보, 사회의 진보와 정의를 위해 노력해도, 그 노력이 얼마나 우리 눈에 들어온단 말인가? 우리가 노력했을 때 오히려 퇴보하거나 하진 않았는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프랑스인들은 하지만 식민지인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감각하다. 우리 한국의 현실은 신자유주의건 뭐건, 그저 돈이면 무엇이든 다 된다. 이런 상황은 글을 쓰고 논쟁을 하고 토론을 하고 집회와 시위 등의 투쟁을 해도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진보란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품곤 한다. 그리고 그 의문에 의해 결국 진보적 지향에 대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도 보이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함에도 인간의 진보는 가능하며, 이를 믿고 우리는 끊임없이 홍세화가 이야기한 담론이 한국에서도 좀 더 실현가능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주인의 도덕”이며, “위버멘쉬”의 의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직 정착되지 못한 올바른 토론과 합의의 문화는 사실 니체가 이야기한 “주인의 도덕”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 그리고 진보를 위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영겁회귀”의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위버멘쉬”가 있어야 사회정의와 똘레랑스를 실천할 수 있다.


 의 쎄느강과 한강의 현실은 여전히 아직 오염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책이 강조하고 있는 지점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분명히 조금씩이라도 우리의 현실은 변할 것이다. 이 책들이 들고 있는 강조지점들에 대한 근거들은 다소 약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허무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말이다. 인간은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은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지금”에 천착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비판적으로” 읽은 책은 나와 이 사회에 결국 진보가 가능함을 명철하게 드러낼 것이다.

추천수0
반대수0

묻고 답하기베스트

  1. 남자친구생일선물댓글0
더보기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