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살 여름,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보게 된, 그리고 십년만에 다시 펼쳐 본, 하루키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사실만을 기록한 책만을 취급하던 나에게 소설이 이렇게도 멋진 장르(..)였구나..깨닫게 만든, 그리고 일본문학을 열렬히 사랑하게 만든 책.
내게 여러모로 의미있는 책이고 작가이다.
십년이 지나 지금 기억하고 있는 건,
내 맘에 쏙 드는 책이었다는 것과 표현법이 독특했던 것,
그리고 매력적인 여주인공 "미도리" , 꽤나 비중있었던 나오코란 캐릭터는 아예 내 기억속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새삼 놀랍다. 나의 이 망각이..요즘들어 부쩍..심해진다.
내 기억필터가 확실히, 상당한 양의 기억들은, 지멋대로 걸러내버리는 것 같다. 이게 나이듦...인가...
사람은 없고..풍경만 남아 있다.
이 말이 왜 이렇게 쓸쓸하게 들리는지..
기즈키를 잃은 나오코..나오코를 잃은 와타나베..하쓰미를 잃은 가시와라(가와사라인지..? 이름 몇 번을 봤는데도 헷갈림이셔..-_-;)..
아내를 잃은 남편(미도리의 부친)..부모를 잃은 미도리..
바로 하루 전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생..두 번 다시 없을 오늘..
내 곁에 있던 모든 것들의 사라짐..상실..
모든 상처는 상실의 아픔.
집착하려하면..간직하려하면..담아두려하면..서글프고 우울한 생이다. 다만 우리는..오늘을..오늘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을..오늘 보는 풍경을..온전히 온 맘 다해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 뿐.
스토리도 그렇지만, 나처럼,
주옥같은 문구에 목말라 허덕이는 독자에겐, 최고의 소설이다.
-뭐, 괜찮아. 난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 죽을 지경인 인간이니까.
-그렇게 한가해?
-내 시간을 조금 줘서,
그 동안 미도리를 잠자게 해줬으면 싶을 정도야.
-네가 너무 좋아 ,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조쪽에서 벨벳 같이 털이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나에 관해 싫은게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줘. 고칠 수 있는 건 고쳐 나갈 테니까.
-별로 없는데. 아무것도 없어.
-정말?
-네가 입고 있는 건 뭐든지 좋고, 네가 하는 일도, 말하는 것도, 걸음걸이도, 술 주정도, 무엇이든 좋아해.
-정말 이대로 좋아?
-또 바뀌면 어떤 게 좋은지 모르겠으니까 그대로가 좋아.
-얼마만큼 날 좋아해"?
-온 세계 정글 속의 호랑이가 모두 녹아 버터가 되어 버릴만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