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로 액션이나 록밴드가 나오는 영화를 즐겨 보지만 간혹 내돈주고는 절대 안볼 영화를 부모님을 위해 예매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한다'라고까지 하시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영화를 꽤 좋아하셔서 당신이 일부러 극장을 찾는 일은 드물지만 집에 계실 땐 케이블TV의 영화채널을 거의 끼고 사시면서 간혹 외국배우가 나오면 '저사람이 로버트 드니로냐? 알파치노냐?' 물어보시기도 하는데 찰리 쉰 보고 탐 크루즈냐고 물어보시던 2~3년 전에 비하면 어머니의 데이터베이스도 꽤 방대해져서 이젠 어지간히 잘 나가는 외국 배우들 이름은 거의 다 외우신다(아직도 러셀 크로우와 조지 클루니는 햇갈려하시지만...).
이런 어머니가 좋아하시는(하지만 나는 돈주고 절대 안보는) 영화는 주로 서정적이고 잔잔한 외국 영화다. 풍경이 좋으면 금상첨화~ 얼마 전에 황후화 예고편에서 자객들이 골짜기를 날아다니는 걸 보시구선 '야, 저거 풍경좋다. 나 저거 예매해주라.'고 조르시길래(어머니, 경치좋은 영화 아닙니다. -_-;;;) 한참을 말려서 대신 훌라걸스를 보여드렸는데 보기 전엔 계속 투덜거리시더니 보고 오셔선 너무너무 재미있었다시면서 이런 비슷한 영화 있으면 또 예매해달라고 하셨다.
두어달 지나도록 볼만한 게 없다가 요게 눈에 띄길래 사전답사(?) 삼아 보구 왔는데 얼마 전 건강검진권 끊어다드렸더니 '결과가 무서워서 받기 싫다'시며 끝끝내 검진을 안받으시던 어머니한테 이걸 보여드려야되는지 말아야되는지 난감해진다. -_-;;; 서정적인 음악이 흐르는 잔잔한 사랑이야기에 아름다운 자연풍경도 나오는, 어머니 보여드리기에 '이보다 더 적당할 수 없는' 영화이건만 치매(영화속에선 알츠하이머병이라고 나오지만 많이 쓰는 용어를 쓰자)에 걸린 남편과 옆에서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를 연기한 두 주연배우들이 너무도 생생한 호연을 해주는 탓에 나이드신 분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괜히 덜컥 겁이나 내시지 않을지 걱정이다.
어쨌든 영화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지만 신파로 흐르지 않으면서 중년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얼떨떨한 느낌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은 아마도 영화 내내 이어지던 투병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됨을 암시하는 듯 한데 시점상으론 마지막 장면 이후에 위치하는 오프닝 장면이 생략되었더라면 주인공이 겪은(그리고 겪을) 아픔에 대한 감정이입이 몇 배는 커졌을 뿐 아니라 마지막 장면 이후 상황 전개에 대해 훨씬 풍부한 상상의 꺼리를 제공하는 영화(개인적으론 별 네개까지도 줄 수 있는)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워진다. 오프닝 장면은 그 모든 상상을 생략시켜버리는 스포일러 구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