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잔인한 현실을 위한 따뜻한 동화책을 쓰다.

손일환 |2007.05.12 13:27
조회 33 |추천 0
[Focus] 이경희 월드│잔인한 현실을 위한 따뜻한 동화책을 쓰다 [매거진t 2007-05-11 17:00]    

사람들이 한 여자를 둘러싸고 괴롭힌다. 그러자 한 남자가 외친다. 죄 없는 자만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그러나, 사실 그 남자는 여자를 지켜줄 수 있는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여자와 함께 돌을 맞는 것뿐이다. KBS 의 명태(원빈)가, KBS 의 상두(정지훈)가, KBS 의 무혁(소지섭)이, KBS 의 복구(정지훈)가 그랬다. 명태는 연상의 미혼모 상란(박지영)을 대신해 싸웠고, 복구는 조폭에게 각목으로 얻어맞으며 은석(신민아)을 지켰다. 에서 에 이르는 이경희 작가의 연인들은 늘 그렇게 사랑했다. 거칠고, 무뚝뚝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온 몸에 상처를 입으며 여자를 지키는 것 외엔 애정표현조차 할 수 없는 남자들. 그리고, 그 남자들이 상처를 감수하며 지켜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남자들에게 짐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감싸줄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여자들. 상란은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세상 온갖 풍파를 견뎌낸 여장부였고, 은석은 무력한 부모를 대신해 집안의 살림을 떠맡았다. 가녀린 몸을 가진 은채(임수정)마저도 무혁을 위해서라면 악을 쓸 정도로 강단이 있었고, 은환(공효진)은 깔끔 떠는 공주가 아니라 어머니와 소주를 들이켜는 것을 좋아하는 털털한 여자였다.

‘미안’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만큼 ‘이 죽일 놈의’ 사랑

부터 에 이르는 이경희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늘 강한 남녀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부딪치는 이야기였다. 상란과 상두는 도저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상대방을 힘들게 했고, 무혁과 복구는 자신이 벌인 복수극 때문에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그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들은 세상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미안’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만큼 절절했고, ‘이 죽일 놈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독해졌지만, 그들의 사랑을 독하게 만드는 현실의 벽 때문에 사람들을 그들의 사랑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기묘하게도, 이경희 작가의 드라마에서 현실은 현실이 아니면서도 현실이다. 상란을 위해 마치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쉴 새 없이 싸우던 명태부터 은환을 위해 고등학교로 들어간 상두, 머리에 총알을 박은 채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향해 돌진하는 무혁의 모습은 현실 속의 인물인 듯하지만 사실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명태의 사랑이 에서 권력가이면서 상란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갖은 수단을 다 쓰는 전 남편의 집요함이나, 사상 문제 하나로도 한 가문이 몰락을 경험할 수 있는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이 보여주는 힘겨운 현실에 의해 수긍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이경희 작가는 판타지에 가까운 사랑과 현실을 대비시키면서 그들의 사랑을 수긍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악하지 않다. 그러나, 무지하고 이기적일 수 있다

그래서 MBC 에서 기서(장혁)와 영신(공효진)이 현실에 맞서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부모와 불화하면서 어느 한 군데 마음 붙일 곳 없이 살고, 싸움으로 다친 상처를 스스로 꿰메기까지 하는 기서나 에이즈에 걸린 딸에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사는 미혼모 영신은 이경희 작가의 전작들 못지 않은 독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는 그 독한 설정을 독한 사랑이 빚어내는 파국으로 몰고 가는 대신, 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이 기서와 영신의 사랑만을 가로막는다면, 그들은 영신이 살았던 푸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들을 힘겹게 만드는 건 미혼모인 영신, 에이즈 환자인 봄이, 치매 환자인 할아버지의 존재 그 자체다. 그들은 어딜 가서든 환영받을 수 없다. 석현(신성록)의 말대로 영신의 남자가 되는 것과 영신의 ‘가족’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즉, 영신의 가족이 푸른도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단지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뿐만 아니라 기서 자신이 영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는 이경희 작가의 모든 작품들 중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따뜻한 동화가 될 수 있었다. 봄이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는 섬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에 가려져 있던 잔인한 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들은 영신을 쫓아내려 하고, 아이들에게 봄이를 배척하도록 가르친다. 푸른도 사람들이 기서와 영신에게 서서히 설득되는 건 그들이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바뀌는 건 기서와 영신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는 가장 현실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소재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섬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을 적당히 포장하는 대신 그들의 이기심을 넘어설 수 있는 휴머니즘의 열정을 보여준다. 인간은 악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무지하고 이기적일 수 있다. 자기 자식을 에이즈에 감염시키지 않기 위해 남의 자식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욕할 수만 있겠는가. 그들을 설득하려면 영신처럼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남의 자식부터 구하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독한 대사들만이 남은 세상 밖의 사랑

가장 당연한 가치를 말하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휴머니즘이 만들어내는 감동. 이것은 이경희 작가가 자신의 가장 좋은 장점을 가장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깊은 상처를 가진 남녀가 사랑 하나만으로 현실을 돌파하던 이경희 작가의 전작들은 따뜻한 휴머니즘과 잔인한 비극의 양면을 동시에 가졌다. 에서 명태가 가문의 몰락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고 할 때, 에서 상두가 제비족을 관두고 돈을 벌기 위해 구슬이라도 꿰겠다며 나설 때, 그것은 현실을 비현실적인 사랑으로 뛰어 넘으려는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뭉클한 감동을 전달한다. 그러나, 아무리 상두와 은환이 현실을 극복하려 노력해도 그들은 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처럼 ‘절망 없는 세상’을 각오하고 살아야 했다. 애초에 가진 것 없는 남녀가 죽음을 각오한 채 벌이는 사랑은 비극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경희 작가는 어느 순간부터 절망 가득한 현실 대신 그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남녀의 사랑을 보여줬다. 에서 묘사된 풍부한 시대적 배경과 에서 상두와 은환을 감쌌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에서 크게 축소됐고, 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소재로 쓰인 연예계나 재벌 그룹의 이야기는 디테일을 잃었고, 남은 것은 늘 불행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남녀의 절망적인 사랑 고백뿐이었다. 와 의 연인들이 작품 후반 거의 흡사하게 둘만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다. 현실의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절망밖에 없는 그들은 세상 바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와 에서 보여준 현실을 극복하는 인간의 따뜻함은 사라지고, 남은 건 독한 사랑과 독한 대사들이었다. 는 그 독한 사랑을 평생을 외롭게 산 무혁의 비극으로 승화시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지만, 애초에 형의 복수를 위해 복구 스스로 ‘나쁜 놈’이 되는 은 이경희 작가의 주인공에게 느낄 수 있었던 그 따뜻함을 줄여 놓았다.

는 바로 이경희 작가가 잃어버린 그 현실의 접점을 되찾으면서 그의 휴머니즘을 더욱 좋은 모습으로 되찾았다. 기서가 천식에 걸린 아주머니를 살리기 위해 한 응급처치 때문에 구속될 위기를 겪고, 거기서 다양한 진술이 의료행위 때문에 구속될 위기에 처하며, 다시 여러 사람의 구체적인 진술과 의료지식에 따라 구제받는 과정은 매우 디테일하게,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기서가 의사인 것은 메디컬 드라마의 붐에 편승한 직업적 선택이 아니라, 기서의 의학적 지식이야말로 푸른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이다. 영신을 배척하는 사람이나, 영신을 돕는 사람 모두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현실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이 무너지는 기적같은 순간이야말로 의 가장 큰 힘이다.

부당함보다는 그것을 고치는 노력에 대해 말하는

이경희 작가가 그 휴머니즘의 감동을 되찾으면서 는 기존 멜로 드라마의 문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녀 주인공이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도, 감정 싸움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고 의지한 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사랑하게 되는 작품 는 의 풍부하고 따뜻한 감성을 되찾으면서 이경희 작가가 세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상처입은 남녀의 사랑 위에 에이즈와 미혼모와 치매 노인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들이 붙으면서, 이경희 작가는 휴머니즘이 그저 드라마를 꾸며주기 위한 가벼운 메시지가 아니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철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지역적으로 고립된 푸른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든 곳에서 적용되기 어렵고, 세상 사람들이 푸른도 사람들처럼 설득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거야말로 이경희 작가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아닐까. 잔인한 현실 앞에서도 인간애를 말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드라마를 볼 때만이라도 인간다움에 대해 뒤돌아 보게 만드는 ‘순수하고 현실적인’ 동화의 힘. 그래서, 참 고맙다. 세상에 대한 편견의 부당함보다는 그것을 고치는 노력에 대해 말하는 가, 그리고 독한 사랑고백 대신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기 시작한 이경희가.

(글) 강명석 ( 기획위원)

(매거진t 블로그)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