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스 라이프> 최고의 장면(그 재미로 따지면 단순한 '디저트' 정도로 볼 수 없다.
최근 영화들의 재미있는 장면들을 모아놓고 '재치상'을 뽑는다면 단연 1위를 하지
않을까?)인 'NG 모음'을 보고 실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극장문을 나서면서도, 내내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영화가 한 편 있었는데 그것은 <개미>도, <알라딘>도,
<마이크로 코스모스>도 아닌, <월레스 앤 그로밋(Wallace and Gromit)>이었다. 언
뜻 생각하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공통점 밖에 없어 보이는 두 작품이지만, '아이'와
'부모'의 중간에 끼어있는 연령층의 사람들까지도 적지않게 팬으로 확보하고 있는
<월레스 앤 그로밋>과, 이와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벅'스 라이프>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 실감 VS 정감 >>
우선 <벅'스 라이프>의 최고의 무기는 놀랍도록 발전한 컴퓨터 기술로 가능해진
놀라울 정도의 '실감'이다(오죽하면 포스터의 카피가 '와 - 놀라워라!'일까). 실감나
는 움직임, 실감나는 질감, 실감나는 배경, 실감나는 조명, 실감나는 색채 등 이 영
화가 도달한 실감의 세계는 전 지구적 범위에 걸쳐있다. 여기에 '<토이 스토리>보
다 더 정교해진'이라는 수식어가 몸종같이 따라다니는 것은 물론이다. 필자는 <토
이 스토리>를 아직 못 보았기 때문에 그 수식어가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실감의 세계가 확실히 대단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정말 조악한 수준의 싸구려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요즘 TV에서 직접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 <벅'스 라이프>에는 무진장 돈이 들어
간 움직임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디즈니의 선배 2D 애니메이션들이 이미 도달해
있는 '현실보다 더 부드럽고 우아한' 움직임의 세계다. 질감 표현도 움직임 못지 않
은데, 악당 메뚜기 대장 호퍼Hopper의 강판같은 피부(아니, 껍질), 나방인 집시
Gypsi의 화려한 날개, 엑스트라인 똥파리들의 똥파리 컬러 등의 캐릭터들의 묘사에
서, 햇빛에 투명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나뭇잎, 잎맥에 벌레 먹은 곳까지 꼼꼼히
묘사된 낙엽, 잔 털 하나하나 모두 보이는 민들레 씨앗 같은 자연의 묘사까지. 이
영화의 세부묘사는 가끔 "이거 실사아냐?"하는 착각을 부를 정도이다. 이런 질감은
사계절을 표현하는 다양한 느낌의 조명에 의해 더 생기있게 살아난다. 이미 컴퓨터
안에 조그만 자연 세계가 만들어져 있다고해도 그리 과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징그러울 정도의 자연스러움'이 친근감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
가 애니메이션만이 줄 수 있는 정감어린 재미과 연결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
실 디즈니 만화영화의 정밀한 움직임은 언제나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관
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우리는 그 짧은 다리를 발발대
며 걸어가는 그로밋의 모습이나 실사같은 현실감은 없지만 친근한 정감과 아기자기
함을 주는 월레스의 표정 하나하나에 더 매력을 느끼지 않는가(<월레스 앤 그로밋
>의 '전자바지 소동' 중 펭귄이 보석을 털다가 땀을 흘리는 장면 생각나시죠? 이런
사소한 움직임에서 관객들이 느낀 오밀조밀한 재미를 생각해 보세요. 만약 똑같은
장면을 컴퓨터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는 '디즈니처
럼 동작을 실제와 같이 표현하기만 하면 동작을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이 사라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벅'스 라이프>만 보
아도 이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사실 <벅'스 라이프>를 보면서 '와 - 진
짜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저러려면 차라리 실사 장면과 합성을 하지..'하는
생각이 들곤 했으니까 말이다.
<< 안전빵 VS 모험 >>
이 영화의 감독 존 래스터John Lasseter는 "테크놀로지가 전부는 아니다. 진짜 중
요한 건 스토리와 캐릭터의 창조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 말과는 달리 아직
<벅'스 라이프>는 테크놀로지의 무게에 눌려있는 것 같다(물론 노력한 흔적은 역
력히 보이지만). 우선 이 영화의 스토리 쪽을 보자. 조직(여기서는 '전통을 고수하는
' 개미왕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특이한 개인(여기서는 주인공인 '발명왕' 플릭Flik)
이 조직에서 추방당하고, 입장이 비슷한 아웃사이더들(여기서는 '3류 곤충 서커스단
')을 만나 '돌아온 장고'처럼 조직으로 돌아와 함께 문제를 해결한다는 전통적인 디
즈니 식 이야기 구조가 <벅'스 라이프>에서도 그대로 고수되고 있다. 덕분에 개미
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착안해, 이를 특이하게 각색했다는 주최측의 광고는 힘을 잃
는다. '베짱이'를 '깡패 메뚜기'로 바꿨다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코페르니쿠스적 전
환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정직하게 얘기해서, 지금까지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벅'스 라이프>의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전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더 특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세 편의
에피소드 모두 다른 이야기 구조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월레스 앤 그로밋>으로
비교하면 더 얘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부터 필름 느
와르, <배트맨>, <터미네이터>까지 다양한 영화들을 패로디하면서 장르의 공식을
지신의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낸 <월레스 앤 그로밋>의 '모험적인' 이야기 구조가
대단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이것은 이 영화가 어린이들도 전혀 어려워하
지 않는 영화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캐릭터의 창조'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가장 큰 문제는 캐릭터들을 묘사하는데 있
어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개미왕국 측의 주인공 개미 플릭, 개미 공주 아타
Atta, 꼬마공주 도트Dot, 여왕 개미, 곤충 서커스단 측의 본다면 젓가락 곤충 슬림
Slim, 애벌레 하임리크Heimlich, 무당벌레 프랜시스Francis, 늙은 사마귀 매니
Manny, 나방인 집시, 흑거미인 로지Rosie, 쥐며느리 턱 앤 롤Tuck 'n Roll, 서커스
단장인 벼룩 P.T. 플리P.T. Flea(앗, 레드 핫 칠리페퍼스 베이시스트의 이름과 같네
요. 무슨 관계일까..), 덩치큰 풍뎅이 딤Dim, 깡패 메뚜기 군단측의 대장 호퍼, 호퍼
의 동생 몰트Molt까지. 이 많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96분이라는 시간에, 그것도
어린이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묘사해야 했으니 그 고충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
다. 하지만 정신없이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개성은 판에 박힌 디즈니식 스토리에
공식처럼 꿰어 맞춰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나마 생긴
것 하나는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는 곤충들의 이야기였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
다면 필자같이 사람 얼굴/이름 구별 못하는 사람은 영화내내 헤메다 끝나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플릭이 누구였지? 주인공 개미라구? 그건 플리 아니었
어? 아니, 근데 쟤는 또 누구야? 쟤 왜 공주한테 친한 척 하는거지?"). 어쩌면 디즈
니의 공식 안에서는 나름대로 개성있는 캐릭터가 창조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캐릭터들의 개성이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다분히 캐릭터 상품
판매를 노린 듯한 다양한 캐릭터들의 외모는 귀엽고 화려하지만, 그 이상의 느낌은
주지 못한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플릭이 쓸쓸히 개미 왕국을 떠날때, '전
자바지 소동'에서 그로밋이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집을 쓸쓸히 떠날때 느
껴지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 테크놀러지 VS 상상력 >>
결국 <벅'스 라이프>는 감독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테크놀러지를 뛰어넘지 못한 상
상력이 되었고, 이 상상력의 빈곤은 역으로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테
크놀러지를 무색하게 만든다. "촬영 도중에 몸의 한 부분이 툭 떨어질까봐 노심초
사해야하는 스톱 모션과는 기술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벅'스 라이프> 선임 애니메
이터 글렌 맥퀸Glenn McQueen의 말)"는 말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존 래스터 감독의 말 처럼 "테크놀로지는 예술
적 창의성을 자극한다"는 점이고, 관객들이 그 상상력으로 기획되고 테크놀러지로
실현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점인데, <벅'스 라이프>에서 그런 것들을 찾기
는 어렵다. 곤충 서커스단의 필살기 불 쇼에서도, 꼬마 공주 도트를 구하는 서커스
단의 박진감 넘치는 합동 구조작전에서도, 피빛으로 물든 저녁놀을 뒤로 하고 개미
왕국을 응징하러가는 호퍼들의 비행씬에서도 '테크놀러지에 의해 자극된 예술적 창
의성'은 찾기 어렵다. 그런 장면들은 모두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던가.
오히려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행씬들(예를 들면 뒷부분에서 아타 공주와 플
릭이 호퍼에게 쫒기는 장면이라든지, 헬기 사운드를 동반한 도트 공주 구조작전이
라든지)은 <월레스 앤 그로밋>의 비행씬에 비하면 그 박진감이나 속도감, 그리고
입체적인 느낌이 떨어진다. 오토바이의 보조석이 천길 낭떠러지에서 갑자기 오트밀
죽을 발사하는 기관총을 장착한 전투기로 탈바꿈한다는 아기자기한 상상력은 또 어
떤가(뭐, 이 영화의 상상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겠지만). <벅'스 라이
프>에서 이런 식의 기발한 상상력이나 반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벅'스 라이
프>의 상상력은 단순한 '아이디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이것
또한 어린이 관객을 위한 단순함의 배려일까?). 하물며 '촬영도중 몸의 한 부분이
툭 떨어져나가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따위와 비교해서도 이런데, 3D 컴퓨터 애
니메이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의 세계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지나친 실례일지
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일주일 작업해서 겨우 3초 분량의 캐릭터를 완성'할 정도로
시간과 돈을 들여 고생고생한 보람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영화를 만든 사
람들이야 2, 3초 지나가는 캐릭터들을 보고도 자신이 이룩한 기술적 진보를 실감하
며 행복해 할 수도 있겠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는 미래의 걸작을 위한 밑거름이
야"라고 되뇌이며 사명감에 불타올라야 할까? 하긴 <어비스>라는 비싸디 비싼 실
험이 있었기 때문에 <터미네이터 2>라는 걸작이 가능했다는 얘기도 있으니 말이
다.
<< 하지만 >>
1.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영화와 비교까지 해가면서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서의 <벅'스 라이프>'를 얘기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존 래스터 감독
의 말처럼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이제 겨우 장편 영화 세 작품을 배출한, 아직은
생소한 분야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누가 알겠는가? CG가
최초로 도입된 영화 <트론>이 발표됐을때, 이 영화에서 아무도 <터미네이터 2>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람들이 3D 컴퓨터 애니메이션
이라는 사실 자체에 호기심을 느껴 이 영화를 찾는 단계는 지났으면 좋겠다"는 존
래스터 감독의 말은 아직 희망사항에 그치는 얘기가 될 것이다. 사실, 그것 말고는
이 영화에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그리 특별한 점도 없으니까 말이다(물론 여
기에서 '관객'이란 아이도 부모도 아닌 어정쩡한 나이의 관객들을 말한다). 'NG모
음'은 그런 관객들을 위해 준비된 막판 뒤집기일까?
2. 하지만 지금까지의 얘기가 '이 영화는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영화여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니까 오해하시지는 마시길.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새로움이라는
관점을 떠나서 얘기한다면, '무난한 재미'를 느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얘기하
는 것이 정확하겠다. 물론 진부한 디즈니 식 스토리에 진부한 디즈니식 캐릭터이지
만, 그런 뻔함에서도 재미를 끌어내는 것이 메이저 영화의 특징이 아니었던가요. 게
다가 <벅'스 라이프>는 여전히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재기발랄한 가족오락물이라
는데는 별 이견이 없다'고 하니 위에서 주절거린 말들은 어쩌면 공염불에 불과할지
도 모른다. 아이들이 좋아할꺼라는데 뭐.
3. 하지만 역시 <월레스 앤 그로밋>은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영화 곳곳에서
생활처럼 묻어나는 캐릭터들의 개성, 눈 앞에 드러나는 느끼하지 않은 유머와 숨은
그림처럼 감춰둔 아기자기한 유머, 대책없는 '꿈과 희망과 사랑의' 같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영화적인 분위기, 예측을 불허하는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 재치와 박진감
넘치는 화면구성과 영화적 장치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어정
쩡한 나이나 모두 좋아할 수 있는 그리 흔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 등은 <벅'스 라
이프>가 가지지 못한 장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