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아름다운 비밀(2)

최은경 |2007.05.18 06:51
조회 27 |추천 0

아내 나영의 진통을 보고 도저히 가만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사내 비서실장 겸 태훈의 운전기사인 민우와 동행한 길이다. 3대째 태훈의 집안에 주치의로 있는 안진호씨를 모셔오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오도가도 못한 채 차에 갇힌 신새가 된 것이다.

" 빨리 가야 하는데 이 빗길엔 아무래도 무리겠지? "

 유리를 때리는 빗물을 아무리 열심히 닦아내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물 때문에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태훈을 보며, 그의 질문이 민우를 향한 것인지 잘 알지만 진호가 대신 입을 연다.

"너무 걱정 말게. 초산인데다 산모도 태아도 다 건강하고, 진통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동이 틀 무렵에나 출산할걸세. 초산은 아무리 빨리 낳아도 열시간 넘게 걸린다네. 그러니 너무 걱정 말게. "

노련한 주치의의 말에도 태훈의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않아 초조한 빛이 역력한 태훈에게 민우가 놀리듯 한마디 한다.

 " 아빠가 되는 일이 그렇게 초조한 일이라면 조금 외롭긴 해도 혼자가 낫겠습니다. "

 그의 말에 태훈이 비서실장 겸 운전기사인 그를 쏘아본다. 그순간 비바람소리 때문에 분명하진 않지만, 누군가 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민우의 귀에 들리는 듯 했다.

 " 사장님, 누가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

 " 설마, 잘못 들었겠지! 이런 산길에 더구나 비까지 오는데 누가 오겠나? 정 마음에 걸리면 손전등을 한 번 비춰보게. "

 태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민우는 운전석 바로 옆에 비치된 손전등을 들어 스위치를 켠 뒤 차 창밖을 비춘다. 불빛이 어둠 뿐인 유리를 비추는 순간 하얗게 떠오르는 여인의 얼굴에 민우는 하마트면 비명이 터질 뻔 했지만, 1월의 찬 비를 맞으며 차 창에 기댄 여인이 안스러워 비가 안으로 들이치는 것도 무시한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여인을 안아 차 안으로 들인다. 여인도 민우도 겨울비에 흠뻑 젖는다. 여인을 보는 민우의 얼굴에 아픔이 묻어난다.

 " 해란아! "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는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의식을 잃어가는 여인의 눈 속에 한 남자가 있다.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해란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안타까움과 아픔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이름을 애절하게 부르는 남자의 눈이다. 그의 눈에서 흐르던 그것은 눈물이었을까? 아님, 빗물이었을까?

 "그렇게 망연자실해 있지 말고 우선 나를 좀 도와주게.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하지 않겠나. "

 진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민우가 그를 도와 해란을 뒷자리로 옮긴다. 진호와 민우가 여인의 얼굴에서 발끝까지 문지르고 주무르기를 셀 수도 없이 반복한다. 히터는 이미 최강으로 올려져 차 안의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진호가 고무장갑을 끼더니 여인의 임신복을 들어올려 현재 상황을 살핀다.

 " 이미 아이의 머리가 애기 주먹만한 크기로 보이네요. 이런 몸으로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네요. "

 진호는 옥시토신(자궁수축제)을 해란의 엉덩이에 투여한 뒤 정신을 잃은 그녀의 뺨을 몇 차례 세게 때리며 소리친다.

 "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 지금 아기의 머리가 산도에 걸려서 빨리 낳지 않으면 아기는 죽어요. 제발 정신 좀 차려봐요. "

 해란이 힘겹게 눈을 뜬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꿈을 꿨다. 꿈에 그녀는 보았다. 절벽 아래 나무뿌리에 매달린 해란의 손을 잡고 애처로운 눈길로 올려다보는 세살박이 계집아이의 눈을. 그 눈 빛이 너무나 아파보여 그녀는 있는 힘껏 아이를 끌어올려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다. 아이를 꼭 살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난 그녀다.

 온 몸의 뼈 마디마디가 떨어져 나가듯 고통스럽지만, 그녀는 묵묵히 참아내며 아이를 위해 배에 힘을 준다. 기운을 아끼기 위해 그녀는 신음소리조차 참는다.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는다. 몇 차례의 산통이 그녀의 몸을 난도질 한 뒤, 아이의 머리가 나오자 거짓말처럼 폭풍우가 그친다. 아이의 머리가 나온 뒤

다시 한 번 힘을 주자 아이의 남은 부분이 쉽게 나온다. 진호는 깨끗한 타월로 아이를 감싸안고, 탯줄을 자르지 않은 채 그대로 두고 빠르게 말한다.

 " 이곳엔 흡입기를 작동시킬 전원이 없어서 아이의 코와 입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할수 없습니다. 이제 폭풍우도 그쳤으니 빨리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태반이 나오려면 2~30분정도 걸리니까 그 안에 도착해야 합니다. "

 민우는 사장의 말이 떨어지도록 손 놓고 앉아있을 우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재빨리 앞자리로 옮겨앉은 뒤 액셀을 밟고 출발한다. 태훈은 민우의 성격을 잘 알기에 궂이 주치의의 말을 옮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평소에 10분 정도 걸려 달린 길을 5분도 못돼 도착한다.

 그동안 해란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진호는 아이를 태훈에게 맡긴 뒤 여인의 상처를 살피기 위해 블라우스의 한 쪽 팔을 완전히 잘라내버린다. 그녀의 왼 쪽 어깨에 난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다. 진호는 상처의 피를 닦는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는 피를 지혈하기 위해 그는 상처를 소독하고 깨끗한 거즈로 드레싱한 뒤 붕대로 상처를 꼭꼭 동여맨다.

 " 홀몸도 아닌 여자가 어쩌다가 총상을 입었는지 모르겠네요. "

 처치를 끝내고 뒷정리를 한 뒤 다시 아이를 받아 안으며 진호가 낮게 중얼거린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