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태는 수정란/배아/태아 상태의 미성숙 예비인간을 인위적으로 죽도록 만드는 것이다. 수정란/배아/태아는 일반적으로 인간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견되는 잠재성을 가지기 때문에, 낙태는 인간 존엄성 훼손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민감한 문제로 취급되어왔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수정란/배아/태아의 잠재성과, 그에 따라 인정되는 도덕적 지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모든 종류의 낙태에 대해 그것을 살인과 같은 층위의 도덕적 행위로 취급한다.
그러나 잠재성에 관한 논의는 결국 귀납적으로 '어디서부터가 인간이냐'는 애매한 논의에 필연적으로 귀착한다. 따라서 잠재성이 인정되는 층위를 어디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일반적으로는 인정될 수 없는 도덕적 규제가 생겨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정란 상태의 세포 덩어리를 도덕적 지위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면,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 피임기구(루프 등)의 사용이 도덕적으로 문제시 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수정되기 이전의 난자나 정자 상태의 세포에 대해 잠재성을 인정한다면, 수정을 막는 피임기구(콘돔 등)의 사용 역시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실제로 가톨릭 진영에서는 어처구니 없게도 콘돔을 사용하는 피임에 반대한다).
뿐만 아니라 신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세포 상태에서도 이미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면, 난자에 세포핵을 이입하는 방식으로 생명체로 자라날 수 있는 체세포 개체도 각각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판단이 맞다면, 면도나 양치질은 수백만명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같은 일이 된다(피터싱어의 『생명윤리학』에서의 비유). 따라서 우리는 잠재성에 관한 논의가 수정란/배아/태아의 도덕적 지위를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을 지칭할 때, 그것을 단순한 '호모 사피엔스'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즉 생물학적 인간 개체는, '존엄한 존재로서의 도덕적 지위'를 갖는 것으로 완성되기 위해 여러가지 여타의 요소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수정란/배아/태아 상태의 예비인간을 생물학적 발현 정도에만 근거해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연속적 과정에 대한 논의에 분절적 기준을 도입하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살인에 반대하면서 낙태에는 찬성하는 논의는 어느 경우에나 불가피한 반박에 부딪치게 된다. 예컨대 '생물학적 잠재성의 완전한 발현 및 그 개체의 사회화'가 인간의 구성요건이라면, 미성숙상태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성장하고 있는 신생아의 지위는 묘연해진다(위의 정의를 충실히 따르자면 그것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태어난 아이'의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의심하지 않는 '인간 존엄성'에 기반한 상식을 전제로 판단할 때, 우리는 수정란/배아/태아 상태의 예비 인간을 낙태할 수 있는 범위를 '어느 시점'에선가 합의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합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을 재차 탐색할 수 밖에 없는데, 경험적 삶의 시작 여부는 그중 좋은 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고나 자아인식, 그 밖의 복잡한 정신작용을 수행할 신경생리학적 구조 및 기능을 갖추지 못한 태아의 경우에는 사실상 경험적 삶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없는데, 그것은 생명체로 구조화된 유기체라는 점을 제외하면 아직 어떠한 인간존재로서의 지위나 의미도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태아의 상태가 위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에, 우리는 낙태에 대해 보다 확고한 도덕적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