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성까지 함락한 왜적이니 이제 남은 것은 동래성이겠지요.
동래읍성의 남문에 도착한 왜적은 제1군인 고니시유키나와(小西行長 - 소서행장) 군이랍니다. 그가 선발대가 된 이유는 그의 사위가 대마도주(소오 요시토시 - 宗義智(종의지))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사위를 앞세워 조선의 침략길을 잘 이끌어가라는 뜻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군으로 선발했답니다. 물론 너무 성격이 급한 가토 기요마사보다는 낫다고 본 것일까요.
동래성 남문에 도착한 왜적은 우선 점잖게 나옵니다. “전쟁을 하자. 빨리 나와라.” 이렇게 나오거나 조총을 쏘면서 공격을 했을 것 같은데 우선 우리 편의 의중을 떠보기 위하여 목판을 하나 세워놓곤 물러갔답니다. 송 부사가 군관 송봉수를 시켜 가서 보게 하니 거기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답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 -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우리에게 길을 비켜 달라.) 여기에 송 부사님이 목패에 써서 던진 글귀가 바로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입니다. 이 글귀는 지금도 충렬사 마당의 충렬문 올라가기 전에 비석으로 새겨져 있지요.
요즘 전쟁보다는 조금 멋있게 시작한다는 느낌이네요. 길을 비켜달라는 말에 그건 곤란하다는 대응, 그냥 미사일을 날리고 폭격을 시작하는 요즘 전쟁과 비교해보면 시작은 제법 근사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나라를 침략한 작자들의 소행이니 괘심하긴 매한가지겠지요.
남문 앞에서 적은 조총으로 공격을 합니다. ‘鳥銃’(조총), 말 그대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총이랍니다. 당시의 전쟁에선 아주 최신식의 무기지요. 이런 무기 앞에 우리 군사들은 화살로 대응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답니다.
일본은 자기들 통일전쟁에서 조총을 사용해본 경험으로 여러 가지 작전을 구사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조총은 화약이 타들어가는 시간이 있으니 그 사이에 공격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 지휘관들의 생각이 완전 엉터리였음을 이 전쟁에서 알게 된 것이랍니다. 대표적인 장군이 바로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신립 장군이지요.
남문에서의 총공격에 맞서 우리 병사들과 읍민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막아내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도 남문 공격으로는 성이 무너질 것 같지가 않다는 판단을 내리고 측면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로 인생문 쪽으로의 공격입니다. 지금도 복천박물관에서 명장초등학교 쪽으로 넘어가는 찻길이 인생문 고개라고 한답니다. 최근 그 고개에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답니다.
人生門(인생문)이란 그 고개를 넘어서 도망간 사람들은 모두 살았다고 하여 인생문이라고 하는 이야기와 그 고개를 통하여 동래읍성에 살던 사람들이 죽으면 시체가 나갔는데 그래서 人生無常(인생무상)하다고 하여 인생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인데도 북문을 통하여 도망가는 장수도 있네요. 변박이란 화공이 그린 ‘동래부순절도’라는 그림에서 보면 경상좌병사(종2품의 경상 좌도를 지키는 육군 대장이다.)인 李珏(이각)이란 장군은 전쟁이 일어나자 동래성에 가까이 와서 군관에게 사정을 알아보라고 하고는 적의 수가 너무 많음을 직감하고는 송 부사에게 동래성을 부탁하고는 자기는 군사를 모아서 데리고 오겠다며 그길로 36계 줄행랑을 쳐버렸답니다. 물론 나중에 잡혀서 처형된답니다.
이렇게 도망가 버린 장군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민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적을 물리치려고 노력했답니다. 성이 무너지기 전에 우리 병사들과 읍민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을 하였는지 이제부터 한사람씩 살펴봅시다.
먼저 송상현 부사님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요즘으로 하면 부산시장격인 동래부사 宋象賢(송상현)은 字(자)는 德求(덕구)이고 號(호)는 泉谷(천곡)인데 본관은 礪山(여산 - 여산 송씨란 뜻)입니다.
1551년(명종 6) 1월 8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난 재주로 글을 읽어 10세에 이미 經史(경사)에 통달하였답니다.
15살에 陞補試(승보시 - 성균관 대사성이 四學(사학)의 유생에 대하여 매년 시험을 쳐서 성적이 우수하여 式年(식년 - 子, 卯, 午, 酉의 간지가 돌아오는 해에 치는 시험, 3년마다 친다.) 시험에서 장원을 하여 나이 20에 진사가 되었고(1570년),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承文院正字(승문원정자)의 벼슬을 제수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관에 오를 때부터 將相(장상 - 장군이나 높은 벼슬을 할 사람)의 재질이 있다고들 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변방의 관직에 머물다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에 執義(집의)로서 通政大夫(통정대부)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었습니다.
이때는 일본의 침략이 기정사실화 되던 시기인데 일본은 우리의 약점을 알아내어서는 침략의 발판을 삼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답니다.
4월 14일 아침에 부산진성을 무너뜨린 적들이 오후에 동래성에 몰려와서는 그날 저녁부터 대치를 했답니다. 4월 15일 아침부터 적의 총공격이 시작되어 남문의 쉽게 무너질 것 같지가 않자, 성의 동북면 산쪽으로 몰려와서는 수비가 허술한 성을 허물어버립니다. 대체로 인생문 근처라고 말하고 있답니다. 이때가 10시 경이라고 합니다. 불과 3-4시간 만에 동래읍성이 무너지게 된 것이지요. 衆寡不敵(중과부적)이란 표현이 어울릴 겁니다. 훈련받은 적의 군사가 많으니 우리 성민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지만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지요.
성이 함락되자 쓰러진 성민들의 시체를 밟고 피에 굶주린 듯 밀려오는 왜적들이 동래성의 수장을 찾았겠지요. 그러나 송 부사님은 동요하지 않았답니다. 적중에는 평平調益(평조익)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平調信(평조신)을 따라 왕래할 때 송 부사를 만난 일이 있고, 또 후히 대접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그 후의에 보답하고자 성 옆 빈터로 우선 피하라고 눈짓을 하였고, 다시 손을 들어 옷자락으로 신호까지 보냈지만 송 부사는 한마디로 거절하고 일어나서 殿牌(전패)를 모신 객사를 향해서 북향하여 네 번 절했답니다. 네 번 절하는 것은 임금님에게 하는 인사지요. 이제 마지막을 알리는 인사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러나 송 부사의 태도는 그의 글에서 잘 나타나는데, 끝까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답니다. 송 부사가 손을 깨물어 피로서 부채에 쓴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孤城月暈(고성월훈)
列鎭高枕(열진고침)
君臣義重(군신의중)
父子恩輕(부자은경)
외로운 성은 달무리 지듯 포위되고(동래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외로이 달무리가 진 것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이웃한 여러 진은 잠든 듯 고요한데(주변의 여러 진에서는 원병이 올 소식도 없다는 뜻)
임금과 신하 의리 무거운 것이라(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중하기 때문에)
아비와 자식 은정 가벼이 하오리다(아버지! 자식의 도리를 다 못하고 갑니다. 부디 용서하소서!)
얼마나 비장합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성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마침내 마지막임을 알고서는 절명시를 써야 하는 부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이 시를 아버지에게 보내고는 42세를 일기로 의연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부하에게는 “내 허리에 콩알만 한 사마귀가 있으니 내가 죽거든 이것을 표시로 삼아 내 시체를 거두라.”고 하였답니다.
바로 송 부사님이 돌아가신 자리가 지금의 송공단 자리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靜遠樓(정원루)라는 누각이 있던 자리였답니다. 부사님이 한 번씩 올라서는 시회를 읊던 자리였지요.
왜적 평조익과 현소 등이 공의 장렬한 죽음에 감탄하였으며 공을 해친 자를 잡아서 따라 죽게 하였다는 점만 보아도 송 부사님은 일본에서도 그 인품과 명성이 자자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지요.
공의 시신은 남문 밖에 묻고 표목에 ‘충신 송상현의 묘’라고 써서 세우고 시를 지어 제사를 지냈답니다. 이로부터 동래성 남문에 위에 붉은 기운이 수년 동안 빛나고 있었답니다. 이 기운을 본 적들은 더욱 두려워 “송상현과 같은 충의지사가 있으니 조선에는 이런 충의지사가 얼마나 더 있을 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지요.
지금 공의 묘는 청주 加布谷(가포곡)의 산 중턱에 있습니다. 선조 28년(1595년), 전쟁 중이었지만 공의 시신을 운반하여 모시자는 요청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國地師(국지사)를 보내 묘지를 잡아서 장사를 지냈답니다. 많은 백성과 아전들이 영구를 붙잡고 호곡하며 백리 밖까지 따라와 전송하였답니다. 적장 加藤淸正(가등청정 - 가토 기요마사)도 부하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 숙연히 전송했다고 합니다.
동래의 戰況(전황)과 송 부사의 공적이 알려지자 2년 후 갑오년(1594년)에 兵使(병사 - 병마절도사) 김응서의 장계로 처음에는 資憲大夫(자헌대부) 吏曹判書(이조판서)로 증직하였으나 숙종 7년(1681년)에 대신들의 獻議(헌의)에 의하여 崇政大夫(숭정대부) 議政府 左贊成(의정부 좌찬성)겸 判義禁府事(판의금부사)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弘文館 大提學(홍문관 대제학) 五衛都摠府 都摠官(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더 증직하였습니다.
시호는 忠顯(충현), 義烈(의열), 忠烈(충렬) 중에서 忠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래 忠烈祠(충렬사)가 탄생된 것입니다.
송 부사님이 돌아가시고 효종 2년(1651년)에 당시 부사였던 윤문거가 공의 사당이 남문 옆에 있어(宋公祠 - 송공사) 저습하고 좁은데다 시끄러워 靈(영)을 모시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므로 이에 읍내의 사림들과 의논하여 내산의 남쪽 安樂里(안락리 - 지금의 충렬사 자리)에 이건하고 규모도 크게 하여 안락서원으로 삼아서 후세인들이 표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밖에 송 부사님을 모시는 곳은 古阜(고부)의 旌忠祠(정충사)와 고향인 청주의 莘巷書院(신항서원), 개성의 崇節祠(숭절사), 鏡城(경성)의 禾谷書院(천곡서원) 등이 있답니다.
송 부사의 묘는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역에는 묘가 앞뒤로 두 기가 모셔져 있답니다. 위쪽에 위치한 묘는 송 부사의 묘이고, 앞에 있는 묘는 송 부사를 모시던 김섬과 첩이었던 이씨 부인의 합장묘랍니다.
송 부사의 묘는 망주석에 문인석상, 그리고 산양 두 마리가 묘를 지키고 있고 중앙에는 근래에 세운 장명등이 있으며 묘비에는 ‘忠烈公泉谷宋先生之墓(충렬공천곡송선생지묘)라고 쓰여져 있답니다.
이 묘는 아마도 본부인과의 합장묘로 추정되는데 묘비에는 부인에 대한 내력은 적혀 있지는 않답니다.
앞쪽의 봉분이 동그랗게 잘 가꾸어진 묘에는 상석이 연이어 두 개가 놓였답니다. 하나는 李良女(이양녀)라고 하는 공의 첩이고 하나는 송 부사를 따라 죽은 金蟾(김섬, 금섬)의 것이랍니다.
송 부사의 첩으로 나오는 이씨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면 그녀도 송 부사를 따라 동래로 내려왔답니다. 공은 적의 공격이 있을 것임을 알고는 급히 서울로 올라가게 하였지요. 가다가 하루만에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서러워 울면서 “내 家君(가군 - 송 부사)의 곁에서 죽겠다.”하고는 급히 동래로 돌아왔답니다. 여자 노비인 萬介(만개), 今春(금춘)과 함께 적에 잡혀 바다를 건너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맞으려 함에 죽음으로 거절하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누이 동생인 守節者(수절자 - 수절한 사람으로 源氏(원씨)로 알려져 있다.)의 저택에 같이 머물게 하고 함께 기거하게 하였답니다.
어느 날 홀연히 폭풍이 일어 담이 무너지기도 하였지만 이씨의 처소는 무사하였답니다. 적도 이에 매우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겨 우리나라 사람을 동행시켜 돌아가게 하니 그녀는 공을 위하여 追服(추복 - 상고를 당하였을 때, 사정이 있어 상복을 입지 못한 사람이 나중에 상복을 입고 복상(服喪)함)하였답니다.
김섬은 함흥의 기생으로서 재질과 용모가 뛰어났는데 나이 열세 살에 공을 따랐습니다. 일찍이 부친의 상을 당해서 애도함이 지극함으로 공은 항상 그의 지조를 중히 여겼지요. 공을 따라 동래에 왔는데 사태가 급하여 공이 朝服(조복 - 관원들이 조하(朝賀) 때 입는 예복)을 갖고 오니 김섬은 공이 의롭게 죽을 것임을 짐작하고 여자 노비 今春(금춘)과 함께 관아의 담장을 넘어 공이 있는 곳으로 갔더니 적은 이미 떼지어 모여서는 공을 해쳤답니다.
김섬도 적에게 잡혀 사흘간이나 적을 꾸짖다가 드디어 살해당했는데 적도 이를 범상치 않게 여겨 관을 차려 공과 함께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일설에는 통천군수 韓彦聖(한언성)의 庶女(서녀)라고도 합니다.)
김섬은 송 부사와 함께 죽었고, 이씨는 송 부사를 위하여 추복을 하였으니 죽어서나마 송 부사님 곁에 묻히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두 분 다 旌閭(정려)가 명해졌답니다.
오늘 아침의 제향에서도 대통령의 조화를 부산시장이 바치는 모습에서 송 부사님을 비롯한 충신들의 거룩한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같아서 마음으로는 흐뭇하였답니다.
다음으로는 동래성에서 송 부사님과 함께 돌아가신 분들을 살펴봅시다.(정발 장군과 윤흥신 장군은 부산진성 전투, 다대포 전투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양산 군수였던 趙英圭(조영규)는 字가 玉聸(옥담)으로 장성 백암리에서 태어났는데 총명하고 腕力(완력 - 팔 힘)이 뛰어났답니다. 1554년에 무과의 을과에 등제하여 훈련원의 초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용천부사를 역임하고 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양산 군수로 나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 동래성이 왜군의 선봉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경상우병사 李珏(이각)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쳤으나, 조영규는 오히려 말을 몰아 송 부사님을 찾아가 “국가가 이와 같은데 공은 장차 어찌하려 합니까?” 하니 송 부사는 “마땅히 이 성을 굳게 지킬 따름이오.”하매 공은 “임금 것을 먹고 임금 것을 입다가 이 위급함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그대와 함께 이 성을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이 편안할 것이외다.” 하니 송 부사는 손을 부여잡고 크게 기뻐하였답니다. 공은 말하기를 “나는 죽기를 결심하였습니다마는 노모가 군에 계시니 돌아가서 작별한 후에 죽음에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며 곧바로 양산에 돌아가서 그의 어머니께 울며 하직하고는 말을 재촉하여 동래로 나아가니 성은 포위되어 이미 위급한지라 칼을 빼들고 눈을 부릅뜨고는 말을 달려 돌입하니 적도 잠시 비키는 사이에 성 안에서도 공이 온 것을 알고는 문을 열어 맞아들였는데 송 부사와 함께 힘껏 싸웠답니다.
성이 함락되는 순간에도 송 부사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답니다. 당시 공의 나이가 56세였답니다.
공의 충절과 효행은 1669년(현종 10년) 宋浚吉(송준길)의 상계로 널리 알려져 숙종 연간에 嘉善大夫(가선대부) 戶曹參判(호조참판) 겸 同知義禁府(동지의금부)를 증직하였습니다.
공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어 아버지를 따라 임지에 와서는 정성으로 섬겼는데 공이 동래부로 가려할 때 아들 廷老(정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비는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에 나아가니 너는 노친을 잘 모시고 고향에 돌아가라.” 이 말은 들은 아들은 울면서 아버지의 명을 받아 할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한 달이 넘어 비로소 고향에 돌아가서 할머니를 편안히 모셨답니다. 후에 적이 동래를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 시신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招魂(초혼 - 죽은 혼령이 돌아오게 하려고 그 혼을 부르는 의식)만 한 채로 돌아와서는 고향의 산에 장사지내고 삼년을 슬피 울고 예로서 제사를 지냈답니다.
복을 벗은 후에도 죽을 먹고 素食(소식)으로 일관하였답니다. 평소에 노복들을 일을 시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물으니 “내가 사람이 자식으로서 맡은 바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차마 先代(선대 - 아버지가 부리시던)의 노복을 불러 일을 시킬까보냐.” 하였답니다.
평생의 처신이 상주의 모양과 같았으며 마지막과 처음이 한결같아서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답니다. 1612년에 집에서 별세하니 당시 나이가 54세였답니다.
동래 향교의 교수를 지냈던 盧蓋邦(노개방)은 밀양사람으로 자는 維翰(유한)입니다. 밀양의 古老(고로 - 노인들)들에 의하면 ‘공은 집안이 가난하여 아이 때에 백운암에서 공부하였는데, 틈이 나면 단풍이 든 나뭇잎에 글씨를 썼으므로 泛鍾閣(범종각)에 많이 덮쳐 쌓이었다. 마침 가을비에 시냇물이 넘쳐 나뭇잎이 계곡 물을 따라 흘러내려가서 수안역의 앞 내에 가득하였다. 巡按使(순안사)가 이를 주워 보고 그 필법을 사랑하여 나뭇잎을 찾아서 백운암에 이르러 불러보아 칭찬하고 상을 주었는데, 이것은 작은 일이지만 공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돈독한 마음 씀씀이를 가진 분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 됩니다.
공의 집안은 가난하였나 봅니다. 어려워서 굶주렸으나 곤궁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절개를 지켰으며, 힘써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여 겨우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녹봉으로는 어버이를 봉양하기에도 벅찼답니다. 이런 와중에 천하의 참혹한 화란을 당하여 목숨마저 잃게 되었지요.
공은 어버이를 뵈러 밀양에 갔다가 전란의 소식을 듣고는 성현의 位版(위판 - 위패)이 걱정되어 급히 향교로 돌아오니 위판은 이미 성 안의 정원루로 옮겨졌으므로, 성문을 크게 두드리면서 울매, 송 부사가 의롭게 여겨 들어오게 하였는데 드디어 위판 앞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이내 모시고 서서 조금도 떠나지 않았으며, 여러 유생과 文德謙(문덤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의 아내도 밀양에서 적을 만나자 그 남편의 紅牌(홍패 - 문과의 회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그의 등급 및 성함을 기록하여 주는 붉은 종이의 증서)를 가슴에 품고서 언덕에서 몸을 던져 죽었답니다.
이러한 그의 충절이 알려지자 도승지에 贈職(증직)되고 동래 충렬사와 송공단에 배향되었으며, 또한 고향인 밀양의 中峯書院(중봉서원)에 봉안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습니다.
공의 고향 이름을 三綱洞(삼강동)이라 하는데 이는 노개방과 그의 부인 이씨, 그리고 의병장을 지낸 손인갑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선조 임금이 내리신 동네 이름이랍니다. 삼강오륜이 살아있는 마음이라는 뜻이겠지요.
諸生(제생) 文德謙(문덕겸)은 아버지 이름이 經緯(경위)인데 그 선대는 본래 南平(남평) 사람(남평 문씨입니다.)으로서 뒤에 동래로 옮겼답니다. 여기서 제생이란 향교에서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우던 학생이란 뜻입니다.
교수 노개방이 밀양으로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 적이 밀려 왔는데 공은 향교에 봉안했던 선현(先賢)의 위패를 스스로 성안의 정원루로 옮겨 모신 뒤 그 곁을 떠나지 않다가 적이 쇄도하여 들어오자 돌아온 노교수와 함께 그 앞에서 조용히 순사하였답니다.
성이 함락되자 적병은 모두 북으로 올라갔는데 문덕겸의 종 儉山(검산)이 있어 몰래 시체를 훔쳐서 부의 서쪽 餘古里(여고리 - 여고초등학교가 있지요.)에 묻었는데 여기가 곧 문덕겸이 사는 곳이었답니다.
그에게는 아들 建中(건중)이 있었으나 일찍 죽자, 아내 민씨가 며느리 정씨와 9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덕겸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姑婦(고부)가 함께 길가에서 죽었습니다.
종 검산이 여주인을 찾아 헤매다 성의 서문에서 찾아내었는데 9살짜리 손녀가 두 시체 밑에 깔려 거의 죽어가고 있어서 검산은 손녀를 금강골의 바윗굴(金岡谷 岩窟)에 숨겨두고 두 시체를 업고 가서 묻었는데 문덕겸 부부는 한 묘에 묻혔으며, 죽다가 살아나 검중에게서 길러진 손녀는 후에 읍민인 金天祥(김천상)에게 시집을 갔답니다.
김천상의 후손은 동래 儒生(유생)인 李東馨(이동형)에게서 비문을 받아 문덕겸의 묘에 비석을 세웠답니다.
검산은 또 주인집 토지 문서를 우물 가운데의 돌 밑에 감추었다가 뒤에 도둑이 물러가자 햇빛에 말렸는데 이로서 문씨의 전답과 토지가 모두 김씨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답니다.
문덕겸은 마땅히 선비로서 책을 읽고 충의를 지킨 점이 높이 평가 받을 수 있겠지만 그의 종이었던 검산은 주인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공보다 낮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가 있어 문덕겸의 이야기는 더욱 빛이 나는 것이랍니다.
검산도 아들은 없고 外孫(외손)만 있었다니 그 주인의 그 노복입니다.
문덕겸은 뒤에 충렬사에 배향되고, 영조 13년(1737년)에는 호조좌랑에 증직되었습니다.
梁潮漢(양조한)은 동래 사람으로 젊어서 향교에 입학하여 문덕겸과 서로 친한 사이였습니다. 교수 노개방이 밑에서 항상 그를 따라서 經史(경사)를 강독하였는데 그 학문이 몸소 실천하는 것에 우선하였고, 두 사람이 校堂(교당 - 향교)에 모이면 서로 친애하고 성품이 또한 강개하여 절의로서 사귀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마침 노 교수가 고향에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라 여러 文生(문생 - 학생)들과 의논하여 문묘에 있는 위패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답니다. 그 중에서 여러 위패들은 땅에 묻고, 오직 五聖(오성 - 유교의 5대 성인을 말한다.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다섯을 일컫는다.)의 위패만은 성안의 정원루로 옮겨 봉안하였습니다. 노 교수가 전란의 소식을 듣고 돌아왔을 때 함께 侍立(시립)하여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지켰답니다.
요즘으로 하면 그 까짓것 나무 판때기를 무엇이 그리 중요하다고 지키고 서서는 죽음을 맞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선현들의 얼을 이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님을 대하듯 선현들을 대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였기에 위패는 곧 그분들의 몸이요, 정신으로 받들었답니다. 하루라도 깨우침을 얻는다면 언제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었겠지요.
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라는 말도 있잖아요.(아침에 천하의 올바른 政道(정도)로 행해지고 있다는 말은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사람이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당장 죽어도 한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며, 짧은 인생을 값있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
4월 15일 아침에 왜적이 큰 칼을 들어 번개같이 내려치니 梁生(양생 - 양조한)이 바로 맞아 땅에 쓰러졌습니다. 마침 송 부사가 이것을 보고 무릎을 치며 길이 탄식하기를 “애석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노 교수도 또한 오성의 위패를 묻고는 함께 죽음을 맞았지요.
양생의 아들 鴻(홍)도 또한 왜적에게 죽었답니다. 손자 한 사람이 있어 이름을 敷河(부하)라고 했는데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19년 후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기 손자인 부하는 겨우 13세로 죽은 조부(양조한)의 품속에 엎드려 숨었다가 성이 함락되자 왜적이 정원루에 올라와서 시체 속에서 아이가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보고 손바닥을 치며 웃고는 포로로 삼아서 문을 나가서 말에 태우고 베로 허리를 묶어 다리에 이르도록 하여 말을 달려 부산으로 내려가 배에 태워서는 대마도로 보냈답니다.
죽을 고생을 다하다가 31세에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작은 할아버지인 梁通漢(양통한)이 손자에게 묻기를 너는 釜谷(부곡 = 가매실, 지금의 부곡동은 아니다.)에 살았느냐? 勘蠻里(감만리 - 감만동)에 살았느냐?는 물음으로 손자를 찾게 되었는데 부하는 어릴 때 자기가 놀던 부곡의 돌바위에 이르러 이 돌은 내가 어릴 때 놀던 돌이라며 자신이 양조한의 손자임을 증명하였다 합니다. 그때에 이르러 양통한은 형님의 재산과 농토를 모두 손자에게 물려주었답니다.
일본에서 얼마나 고생하였든지 양부하는 春(춘) 3월과 秋(추) 9월의 명절에 일족들이 모여서 주연을 하는 자리에선 술이 취하면 슬픈 노래를 격렬하게 불렀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할까요. 전쟁은 이렇게 아픔만 남기는 것이랍니다. 키가 팔 척이나 되었던 힘 센 손자 부하는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한울타리 안에서 살았답니다.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으면 이렇게 했을까요. 나이 93세에 돌아가셨답니다.
우리가 흔히 양조한, 양통한의 二公(이공 - 두 사람은 형제간이다.)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러한 연유가 있답니다.
宋時烈(송시열)이 南門碑記(남문비기)를 쓴 것은 임진난 후 77년 되는 해(戊申年)이고, 그 비를 세운 것은 庚戌(경술), 즉 1670년인데 이때는 부하가 91세 때의 일입니다.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던 송시열이 그 비문에 양조한의 이름대신 양통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양조한의 후손과 양통한의 후손 사이에 소송까지 벌어졌지요.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감히 고치지 못했답니다.
그 결과 양조한은 사절한 사람이 안 되고 대신 살아있었던 동생 양통한이 死節功臣(사절공신 - 죽어서 절의를 지킨 공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뒤에 양통한은 亂後(난후)의 호적에 보이고, 또 火旺守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