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큼의 재산이 있어야 부자인지 빈부의 등급을 나누어 분석한 사람이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지기지우(知己之友)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축척지도인 동국지도를 제작한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바로 그다. 그는 저서 『농포문답』에서 양식(糧食)을 기준하여 빈부를 6등급으로 나누었다.
세금의 대부분을 이룰 뿐 아니라 곧 백성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양식을 빈부의 등급으로 나누는 중요한 척도로 삼은 것이다.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농사꾼이 한 해 농사를 짓고 나서 나라에서 빌린 환자(環子)를 바치고, 아들딸 여의고 조상제사를 지내고 난 후 쌀 한 가마가 옹골지게 남으면 ‘부자’라고 했다. 당시 쌀 한 가마의 값어치란 지금의 쌀 한 가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쌀 한 가마에 죽고살고
정상기는 일년 양식이 충분히 남아있는 으뜸 부자를 상부(上富), 반년 양식이 남아 있는 집을 중부(中富), 묵은 곡식가 햇곡식을 끊이지 않고 이을 수 있는 집을 하부(下富)라고 했다. 반면 가난하지만 햇곡으로 그해를 넘기고도 좀 여유가 있는 집은 하빈(下貧), 햇곡으로 그해를 넘기지 못하는 집은 중빈(中貧) 그리고 추수한 후에 곧 절량(絶糧)해야 하는 가장 가난한 집을 상빈(上貧)이라 했다. 상빈은 한 해 농사를 지어봤자 소작료와 부세 등을 제하면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야 하는 집이었다.
18세기 중반의 부자들이라면 사대부와 훈척, 상인과 역관들이었다.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는데 비록 곡창지대인 김제 만경들녘의 농사꾼이라도 처자를 배 곯리지 않고, 얼굴에 부황(浮黃) 뜨지 않게 먹여 살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쌀이 귀한 강원도의 농사꾼이라면 일년 내내 조밥에 감자, 옥수수만 삶다가 제삿날에야 쌀밥 한 그릇을 해올렸다. 한 동리에서 밥술이나 먹는 부자를 ‘됫박이나 한다’고 할 만큼 쌀은 귀하고 목숨줄과 같았다. 이처럼 가난은 곧 생존과 관련된 문제여서 옛 사람들은 벗어나기 어려운 가난을 곧잘 귀신으로 표현한다.
귀신처럼 따라다니는 가난
중국 한나라 때의 문인인 양웅은 ‘가난’에게 자신의 주변을 떠나길 부탁하는 노래 ‘축빈부(逐貧賦)’를 지었다. 그로부터 1,300여년이 지난 당나라 때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한유도 양웅의 글을 뒤이어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귀신인 궁귀(窮鬼)를 몰아내는 글인 송궁문(送窮文)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글은 가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결하려는 자세보다는 청빈한 선비의 생활을 자족하기 위한 재담에 머물렀다.
어떻게 보면 가난하게 사는 것에 근심을 두지 않고 그 속에서 도를 즐기려는 삶의 자세를 드러낸 것이다. 반면 한유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유종원의 거권귀문(祛倦鬼文, 나태한 귀신을 쫓아내는 글)은 궁색하거나 자조적이지 않다. 보다 적극적이다.
“사람이 바르고 강하면 신(神)이 돕지만, 곤하고 지치면 권귀가 들어온다. 권귀가 들어올 때는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잠들지 않았는데도 꿈속 같고, 취하지 않았는데도 깨어나기 어렵다.”
정신을 가다듬어 칼날로 삼고 생각을 모질게 하여 창끝으로 삼으며, 뜻을 날카롭게 하여 화살로 삼으면 권귀는 곧 멀리 떠나고 영영 인연을 끊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배부르게 먹고 종일토록 아무런 하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잡기일망정 바둑 장기 두는 것이 오히려 나태함보다 낫다.”는 공자의 지적을 확대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태함일지 모른다.
움직이면 가난은 면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보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한 글들이 있다. 먼저 퇴계 이황의 제자인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전경창(全慶昌, 1532~1585)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첫째, 뜻을 착실하게 가지고 배우고 실행하는 태도가 성실하고 근면하고 삼가는 사람은 항상 모든 일을 떳떳하게 처리하여 반드시 백 가지 천 가지를 성공해서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둘째, 배워도 성공하지 못하고 용렬한 사람은 하는 일이 사리에 벗어나 불량하고 놀고먹는 잡된 사람이 되어 재산은 없어지고 생활할 마음도 없어져 자신의 몸과 가정을 망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전경창이 말하는 바람직한 삶은 농사에 전념하고 재물을 아끼는 것이다. 또한 정승의 길보다 재야에 묻혀 사는 사람을 선택한 영남학파의 거두 조식(曺植, 1501~1572)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했다.
“큰 길거리나 시장을 돌아다니면 온갖 금은이나 진귀한 물건들을 벌려 놓지 않은 곳이 없다. 종일토록 거리를 오르내리며 그 값을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한 가지도 자기 집의 물건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이는 다만 남의 집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오히려 내가 가진 한 필의 베(포목)를 팔아서 한 마리의 고기를 사가지고 오는 것만 못하다.”
다산 정약용이 어느 글에서 쓴 가난을 한탄하는 푸념에도 비슷한 대목이 보인다.
“가난함을 즐기려 해도 정작 가난하면 모든 것이 불편하네. 아내의 한숨소리에 선비의 기풍은 꺾이고, 굶주리는 자식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고민하게 되네. 꽃도 나무도 도대체 쓸쓸하고, 시서(詩書)는 하나같이 너절할 따름이야. 저 농가 울타리에 쌓인 보릿단을 보게. 차라리 농부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