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사랑이...시작되다.
“여전하네... 진홍.”
“어쩐 일이세요? 우연으로 만나기에는 적절치 않은 장소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형도 여전하네요.”
연한 잿빛 수트를 차려입고, 깔끔하게 뒤로 넘긴 긴 듯한 머리...
차림이 약간은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하다. 이사람...
따끈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서는 8년의 세월을 새삼 느낀다.
멀뚱하다...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홍이의 커피에 우유를 듬뿍 부어준다.
“변함없지? 우유 가득 든 커피 좋아하는 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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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필름 기획이사 김진우]
진우가 내민 명함에 적혀있는 글들을 처음 보는 사람 마냥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다.
지금 요망한 자세로 낯선 여자와 침대를 뒹굴며 장시원이 촬영하고 있는 영화의 영화사 기획이사란다...
김진우 선배가...
그래..
예전부터 잘난 사람이긴 했었지...
잘나고 대단한 사람이라 틀리긴 하구나, 이사람...
나보다 세살인가 많았으니...31살
31살의 나이에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영화사의 기획이사라...
“진짜 장시원하고 사귀는 거야.”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던 홍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럼 가짜로 사귀기도 하나요?”
진우의 질문에 괜한 짜증이 밀려온다.
왜..???
장시원같은 남자랑 나같이 하찮은 여자랑 사귀면 안 되나요?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쭉쭉빵빵한 글래머도 아닌
평범한 진홍이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장시원이랑 사랑하면 안 되냐구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아우성이 홍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괜한 자격지심에 요즘 내가 날카로워지나 보구나...진홍
진홍답지 않다.
정말로 진홍답지 않은 날카로운 대꾸에 진우도 꽤나 놀란 듯했다.
“아니... 죄송해요.. 오랜만에 만나서..”
진홍의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홍의 멋쩍은 웃음에, 신선함을 느끼는 진우였다.
진홍...
참 변한거 하나 없구나.
조금 더 마르고, 조금 더 눈이 깊어진 것만 빼면...
오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나...
진우가 아는 홍이는 항상 말이 없었다.
지금처럼...
진우가 후배들을 불러두고 사람 좋게 밥이라도 한 끼 살라치면,
홍이는 항상 그 자리에 없었다,
뭣이 그리 바쁜지...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진홍 때문에
대학시절 그 얼마나 쓰린 속을 술로 달래었는지,
내 앞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앉아있는 진홍...
알고 있냐?
“어쨌든, 함께 일 할 수 있어서 이거 영광이네.. 뭐 이 바닥에서는 워낙에 연예인들 혹독하게 트레이닝 시키기로 유명한 진홍이고, 그런 진홍이 관리하는 장시원인데 어련하겠어? 암튼 잘 부탁한다. 진홍.”
진우가 큼지막한 손을 내밀어 진홍에게 악수를 청한다.
“새삼스럽게.. 부탁은요...”
홍이가 베시시 웃는 얼굴로 진우에게 자그마하고 하얀 손을 뻗어 악수한다.
진홍...
5년 전 봄에도 이렇게 인사했는데...
군 제대하고 들어와서는 1학년 과대라고 동기 녀석이 널 소개시켜 주었을 때
손을 뻗으면서 이렇게 인사했었는데...
‘암튼 잘 부탁한다.’
여전히 그렇게 웃는구나... 베시시...
그래.. 내 앞에서는 그렇게 웃어
너무 활짝 화사하게 웃어버리면 이제 장시원한테 가버린 너를
내가 욕심내 버릴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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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 찍은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뭘 다시 찍어요? 뭐 제 입을 제 연기를 말하기는 그렇지만, 완벽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민망한 연기를 또 다시 하란다.
이 감독이라는 작자가...
지금 내 속이 어떤 줄 알고...
아까, 진홍이 멀쩡히 아니 멀쩡하다는 표현보다는
꽤나 괜찮게 생긴 어떤 녀석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암턴 제비처럼 회색 양복을 쫘~악 빼입은 어떤 놈이
울 홍이를 데리고 나가버렸단 말이다.
빨리 가서 그 놈의 손아귀에서 내꺼 진홍이를 찾아와야 하는데,
이 감독이라는 새끼가,
저 멍청히 생긴 가슴 큰 여배우랑 나보고 침대에서 한바탕 더 뒹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미친놈...
너 같음 그럴 맘이 생기겠냐고?
“아니..시원씨!!! 왜 그래? 지금 몇 번을 설명을 했잖아. 이번 씬은 한 각도가 아닌 세 각도에서 찍어서 편집 할 예정이라고... 그래.. 시원씨 연기야 훌륭했지... 그 훌륭한 연기 아직 두 번을 더해야 한다니까..”
“아니..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멀 각도별로 찍어요? 왠만한 것은 그래픽으로 이 각도 저 각도 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뭘 그리 힘들게 찍어야 한단 말입니까?”
시원을 설득하던 감독이 도저히 못참겠는지 금연인 촬영장에서 담배를 꺼내어 문다.
장시원도 뭘 그리 못참겠는 일이 있는지 거칠게 담배를 입에 꺼내 문다.
한 동안 잠잠하던 장시원이 또 시작이라는 생각에 스텝들이 모두 다 한숨을 내쉰다.
좀 잠잠하다 했다... 저 장시원의 성질머리..
이렇게 하라는 대로 한다면 장시원이 아니지...
감독의 푸념 섞인 한숨 소리가 촬영장에 무겁게 가라앉는다.
“어... 잠깐 쉬는 시간인가요? 시원한 음료수라도 드세요.”
무겁게 가라앉은 촬영장 안으로 홍이가 양손에 가득 음료수를 낑낑거리면 들고 들어온다.
“장시원.. 여기 촬영장 금연인거 몰라?”
날카로운 홍이의 목소리에 시원이 피우던 담배를 서둘러 끄고,
반라의 차림인 것도 망각한 채 달려가 홍이의 손에 들린 봉투를 낚아챈다.
“장시원... 어째 차림이 좀... 그렇다?”
홍이가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화를 참으며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었다.
아주 눈요기 거리를 제공한다...
장시원...
저기... 여자스텝들 좋아라 하는 것...
정녕 네 눈에는 안보인단 말이냐?
“자~~ 음료수 시원하게 한잔씩 마시고 다시 촬영합시다,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끝내고 다들 들어 가셔애지요.”
홍이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민에 휩싸인 감독에게로 음료수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본 시원이 혹시나하는 마음에 먼저 선수를 친다.
선수 친 장시원의 이 한마디에 상황 종료!!!
감독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눈치 못 챌 진홍이라면, 벌써 이 일 관두고도 남았다.
장시원... 네 이놈...
진홍이 도끼눈을 하고 시원을 노려보자, 시원은 못 본 척, 한 손에는 음료수를 들고 대본만 뒤척인다.
이미 찍은 씬...
뭐.. 다시 본다고 새로운 부분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진홍의 무서운 눈길을 피하는 방법은 이길 뿐이라는 것을..
시원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