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容 恕 (2007.7.10)-3

이휘달 |2007.07.11 21:12
조회 64 |추천 0


 [ ⅱ 친절이라는 이름의 종교 ]

 

 새벽 4시 정각에 알람이 울렸다. 나는 안도하며 알람을 껐다. 전날 시장에서 산 그 여행용 시계가 제대로 작동할지 걱정했었다. 전에 샀던 인도제 시계들에게 실망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급히 옷을 입고 카메라 장비를 챙겨 배낭 여행자 숙소를 나섰다. 바깥쪽 히말라야인 디울라다르 산의 어슴프레한 윤곽이 다람살라의 야트막한 구릉지대 너머로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마을이 잠에서 깨어나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지나야 했다. 인적이라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작고 텅 빈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 달라이 라마의 처소를 향해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의 비서실장 보좌관인 텐진 타클라가 사택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소매 셔츠에 긴 회색 바지를 입은 그는 이른 시간인데도 충분히 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나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서늘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셔츠가 땀에 젖어 불편하게 등에 달라붙었다.
 내가 사과의 인사를 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게 해서 죄송합니다."
 잘생긴 30대 남자 텐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달라이 라마께서 새벽 명상을 하실 때 옆에 있었던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저에게도 드문 영광인걸요."
 나는 한 해 전인 1999년부터 우리가 공동 집필하는 책을 위해 달라이 라마와의 특별 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침 일찍 그를 접견하도록 허락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대여섯 명의 인도 병사들과 두 명의 티베트 인 경호원이 사택 입구 주위를 순찰하고 있었다. 텐진은 나를 데리고 곧바로 커다란 철제 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놀랐다. 비록 지난 1년 동안 여러 차례 달라이 라마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유명 인사가 되긴 했지만, 나는 언제나 일련의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야만 했고 티베트 경호원들의 철저한 몸수색을 받아야만 했었다. 모든 방문자가 이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 이 아침, 나는 보이지 않는 선을 넘은 듯했다. 적어도 이제 나는 티베트 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신뢰받는 몇 안되는 달라이 라마의 막역한 친구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숨긴 무기가 없는지 수색당하지 않고 달라이 라마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은 것이다.
 나의 기억은 1972년 3월, 처음으로 이 똑같은 문을 걸어들어갔을 때의 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는 인도인 보초 한 명만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났던 그 봄날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접견을 위해 나름대로 공들여 옷을 입는다고 몸에 딱 맞는 검은색 벨벳 바지를 입었다. 그런데 엉덩이 부분이 문제였다.  너무 닳아서 속이 다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 카불(아프가니스탄의 수도)에서 산 검은 면 셔츠는 가볍고 부드러웠으며, 소매 끝에는 손으로 수놓은 얇은 띠가 대어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마라케시(북아프리카 모로코 남서부의 도시)에서 산 모자 달린 검은 망토였다. 나는 그 망토에 유난히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날이 아주 덥지 않는 한 언제나 그 망토를 조로 스타일로 몸에 두르고 다녔다.
 나는 온통 검은색인 내 의상이 푸만추(영국 작가 색스 로머의 작품에 나오는 중국인 악당)식 염소 수염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난 2,3년간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나는 끈기 있게 그 수염을 길렀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수염이 너무 가늘고 듬성듬성해서, 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풍성한 수염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수염이 내 목젖을 향해 안쪽으로 자꾸만 꼬부라드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수염이 중력에 순응하도록 자주 잡아당겼다. 하지만 날마다 기울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염은 고집스럽게 안쪽으로 휘어졌다.
 내 머리카락은 윤기가 나고, 거의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나는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어 말 꼬랑지 모양으로 묶었다. 마음에 드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그 위에 망토를 드리워 바지 엉덩이의 헤진 부분을 감춘 나는 소위 티베트의 '신왕神王'을 접견할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
 나는 달라이 라마와 그의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홍콩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20년을 보냈지만, 단적으로 말해 영국직할 식민지의 학교 수업에 티베트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나와 내 중국계 급우들의 관심은 오로지 서양 문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서구 사회의 사업과 훌륭한 의과 대학들, 눈부신 기술 발전 등이 그것이었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알려진,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얼어붙은 땅은 분명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고등학교 때 나는 진용(중국 져장성 출신의 유명한 무협 소설 작가)의 책에 매료되었는데, 그는 내가 젊은 시절에 알았던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내 상상 속의 티베트는 진용의 열광적인 정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산꼭대기 은둔처에서 수년간 명상한 끝에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게 되는 신비로운 티베트 라마승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도 그의 무협 소설을 통해서였다. 정신적, 육체적 무예의 화신인 이들 낭만적인 티베트 수도승들의 이미지가 내 의식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내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게 된 것은 뉴욕에서 온 불교 신자 셰릴 크로스비 덕분이었다. 그녀의 친구이자 라싸(티베트의 수도)출신 귀족 집안의 여가장인 도르제 유톡 부인이 그녀를 위해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써 준 것이다. 셰릴은 나보다 불과 두세 살 많을 뿐이었지만 정신적인 성숙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 확신이 서 있었고,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카불에서 납치되어 있는 동안에도 그녀는 우리를 납치한 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만큼 차분한 마음 상태를 유지했다. 탈출한 뒤 그녀는 나와 함께 다람살라로 여행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생애 최초로 티베트 인들을 만났다. 남자와 여자들이 기도 바퀴(나무로 된 둥근 통 속에 기도문 적힌 종이를 말아 넣은 것. 여러 가지 크기가 있음.)를 돌리며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전통 의상과 무릎 높이까지 오는 색색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나는 친절하고 경계심 없는 그들의 얼굴을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그들에게서는 진실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잘 웃고, 또 자주 웃었다. 모든 만남마다 항상 유쾌함과 장난기가 넘쳐 흘렀다. 그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리틀 라싸라고도 알려진 다람살라는 내가 가본 곳 중 가장 명랑한 장소였다.
 접견을 하기로 한 오후, 셰릴과 나는 중년의 티베트 인 수행원을 따라 사택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에는 인도인 병사 한명이 비디(담배 잎사귀를 말아서 만든 싸구려 담배)를 피우며 총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우리가 짧은 진입로를 지나 접견실로 들어가는데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당시 달라이 라마에 대한 보안 조치는 그 정도 수준이었다.
 짙은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접견실은 넓고 환했다. 사방 벽에는 두루마리에 채색된 티베트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편안하고 소박하게 생긴 인도제 팔걸이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살아 있는 신이자 왕으로 추앙 받는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나는 무척 흥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흥분감 속에는 약간의 염려도 함께 깃들어 있었다. 당시 나는 티베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지만, 이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이 50년대 말에 달라이 라마의 조국을 침략해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들어도 점령 기간 동안 중국이 티베트 인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순수한 중국 혈통인 내가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와 얼굴을 맞대고 마주 앉게 된 것이다. 1959년 망명한 이후, 달라이 라마가 많은 중국인들을 만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마음속에 중국인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을까봐 염려가 되었다.
 내가 가능한 모든 상황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 밤색 승복을 똑같이 입은 두 명의 젊은 수도승이 방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나는 금방 달라이 라마를 알아보았다. 당시 그는 37세였다. 하지만 안경과 주름살 없는 얼굴 때문에 그가 무척 젊어 보여 깜작 놀랐다. 다른 많은 티베트 인들과는 달리 그는 얼굴이 창백하고 섬세했다. 그의 부드럽고 겸허한 태도 역시 의외의 사실이었다. 그는 거의 말라보일 정도로 몸이 날씬했다. 함께 나타난 수도승도 마찬가지였는데, 키가 달라이 라마보다 훨씬 작았다. 나는 나중에 그의 이름이 텐진 게셰 테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라싸의 한 유명한 가문의 후손으로, 달라이 라마의 통역관이자 비서실장이었다.
 자리에 막 앉으려다가 달라이 라마는 문득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나를 의식했다. 잠시 내 염소 수염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굵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니라, 높은 톤의 낄낄거리는 웃음이 계속되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참기 위해 몸을 앞으로 구부리기까지 했다.
 텐진 게셰가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려놓고 그를 팔걸이 의자로 인도했다. 한편 셰릴은 이미 달라이 라마를 향해 큰절을 올리기 시작한 터였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웃음소리에 놀랐지만, 어쨌든 절은 다 끝내기로 결심한 듯했다.
 그 3월 오후, 나는 어색한 기분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내가 뭘 해야만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큰절을 하는 법도 몰랐다. 어쨌거나 내 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고 있는 이 젊은 친구에게 넙죽 엎드려 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달라이 라마는 간신히 스스로를 자제했다. 그는 셰릴이 티베트 전통에 따라 흰색 스카프인 카따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내밀자, 셰릴에게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내 것을 펼쳐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나를 또 한 번 훔쳐보더니, 다시금 참을 수 없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엄숙해 보이는 텐진 게셰마저 이제는 이를 드러내 놓고 씩 웃고 있었다.
 그 다음 30분간은 기억이 흐릿하다. 대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셰릴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티베트 불교 신자이며, 뉴욕에 사는 도르제 유톡 부인의 친구라고 말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난다. 셰릴은 달라이 라마에게 특히 자신의 불교 수행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싶어했으며 그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오래전에 잊었다.
 텐진 게셰가 옆에 서서 세심하게 통역을 해주었다. 그 시절 달라이 라마의 영어는 대다수 인도인들이 자기들 문법에 따라 하는 엉터리 영어보다도 못했다. 통역이 없으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따금 몇 가지 간단한 영어문장을 시도하기도 했다.
 셰릴과 대화를 나누면서 달라이 라마는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뭔가 그럴듯한 질문을 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티베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접견실 문으로 들어선 이후부터 줄곧 나를 괴롭혀 온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질문 하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중국인을 미워합니까?"
 달라이 라마는 셰릴과 얘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곧추세우고 앉았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도 간결했다. 그리고 영어였다.
 "아니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그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에 장난기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피해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응시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이 흐른 뒤, 달라이 라마는 옆에 있는 텐진 게셰에게 티베트 어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비서실장이 통역을 시작했다.
 "나는 중국인에 대해 어떤 나쁜 감정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티베트 인들은 중국의 침략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인들은 계획적으로 티베트의 위대한 사원들을 돌 하나까지도 해체하고 있습니다. 다람살라에 와 있는 거의 모든 티베트 가정이 슬픈 이야기를 하나씩은 갖고 있습니다. 중국의 잔학 행위 때문에 대부분의 집이 최소한 식구 한 명씩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중국 공산당과 투쟁하는 것이지, 일반 중국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중국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용서 합니다."
 30년이 지났음에도, 내가 너무도 분명하게 대화의 그 부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아마도 대답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고, 진용이 소설 속에서 묘사한 것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진용의 모든 이야기는 복수를 주된 테마로 다루고 있었다. 남자의 명예는 영웅적이고 단순한 신조, 즉 '눈에는 눈'에 의해 결정되었다. 봉건 시대 일본 사무라이의 규율과 비슷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자신의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가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한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만남에 압도당한 셰릴은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떠날 채비를 하자, 달라이 라마가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나서 나와 엄숙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셰릴과는 상대적으로 무감동한 채로 접견실을 나섰다. 왕을 기대했건만,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왕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비록 다정하긴 했지만, 너무 현세적이고 너무 겸손했다. 그의 둘레에 성자 같은 후광은 거의 없었으며, 그리고 내 모습을 보고 너무 많이 웃었다.
 하지만 나중에 미얀마, 홍콩을 거쳐 미국을 향해 동쪽으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나는 다람살라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내 세계 여행중 최고의 경험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곳의 티베트 인들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1972년 달라이 라마와의 접견을 갖고 나서 10년이 흐른 뒤에도 티베티의 어떤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또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유목민적인 본능에 불을 지폈다. 1984년 부터 나는 카트만두(네팔의 수도)에 근거지를 마련하고서 티베트의 순결한 순례지들에 대한 여행 안내서를 쓰기 위해 4년 동안 광활한 티베트 영토를 방랑했다.
 높은 고원 지대의 풍경은 영혼을 자그하면서도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내가 그전까지 다니면서 본 어떤 풍경과도 달랐다. 그곳의 티베트 인들은 다람살라에서의 기억 그대로였다. 다정하고, 관대하며, 갑자기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내가 인종적으로 중국인에 속한다는 사실도 나를 도와주려는 그들의 마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그 웃는 얼굴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방문한 모든 마을의 집들과 사원들마다 제단 위에 그의 사진이 모셔져 있었다. 내가 만나는 모든 티베트 읜들은 종종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해서 달라이 라마와 그가 상징하는 것이 내 마음속에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와 그의 국민들이 아주 단순한 종교를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머무는 사택의 철제 문이 우리 등 뒤에서 닫히고, 텐진 타클라와 나는 접견실 건물 쪽으로 향하는 넓다란 콘크리트 길을 걸었다.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는 항상 그 접견실에서 이루어졌었다. 그곳은 내가 사택의 가장 깊숙이 가본 곳이기도 했다. 우리는 접견실과 작은 법당을 지나,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지역을 통과했다. 그 너머에 정원이 있고, 달라이 라마가 생활하고, 잠자고, 명상하는 아담한 2층 건물이 있었다.
 품에 껴안듯이 자동 소총을 든 인도 병사가 건물 입구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흰 셔츠 자락이 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평상복 차림의 또 다른 인도인이 무표정하게 우리를 지켜보았다. 티베트인 경호원 서너 명도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걸어다녔다. 잠시 건물 밖에 서 있으면서 나는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달라이 라마의 가장 내밀한 성소의 침입자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때맞춰 달라이 라마가 건물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고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니 하오?"
 그는 내게 중국어로 인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 손을 한 차례 힘있게 잡고 난 뒤, 그는 혼자서 정원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20미터쯤 되는 완만한 비탈길을 힘차게 걷다가 되돌아왔다. 그는 내 쪽으로 걸어오면서 만족한 듯 큰 소리로 웃었다. 나에게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몇 달 전에 우리는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었다. 그때 달라이 라마는 내게, 자신은 신체적인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운동을 하는 데 매우 게으르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절을 하루 30번에서 100번으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진지하게 아침 운동을 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 열심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나와 텐진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건물 바깥으로 난 콘크리트 계단을 걸어올라가 환하게 불이 켜진 2층에 이르렀다. 넓고 탁 트인 공간에 편안한 소파와 팔걸이 의자 몇 개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나무를 깐 바닥의 일부에는 동약식 양탄자가 덮혀 있고,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창이 오른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창을 통해 급경사를 이루는 캉그라 계곡과 새벽빛에 부드러운 빛을 반사하는 산꼭대기들이 내다 보였다.
 그때 달라이 라마가 우리를 자신의 명상하는 방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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