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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로의 귀향.

박민진 |2007.07.12 06:25
조회 22 |추천 0


 귀향 (Volver, 2006)

 

 

 

 가끔 어느 순간에 엄마가 그리워지면서 또한 어쩔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동경으로 나는 가슴이 매어지곤 한다. 그 순간 모든 의욕이 온몸에 붙어오며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그 상쾌한 느낌에 웃어 버리곤 한다. 어느 순간에 혼자서 깊은 감정의 변화를 겪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그 은혜, 그 사랑, 나의 근원. 그 완벽한 쉼터에서 느꼈던 엄마의 살결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기억을 하다보면 난 어느 순간에 그녀의 숨결을 잊어버리곤 한다. 언제인가? 그건 분명 사춘기 때 일 것이다. 왜냐면 그때부터 여자라는 존재가 각인되기 시작 했으니까. 학교를 다니면서 어느새 여자 아이들의 다리와 가슴을 훔쳐보기 시작하고, 난 모든 여성을 엄마라는 것으로 인식하던 눈을 바꿔달고는 여성의 성적인 매력에 흥건히 빠지게 되면서부터 엄마가 아닌 여자를 보았다. 그것이 절대적인 인간의 본능일지라도 역겹지 아니할 수 없다. 나의 엄마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알모도바르. 그가 라만차로 귀향했다. 그곳은 그의 고향이자 나폴레옹의 유적지인 근엄한 도시이다. 또한, 여성들이 서로의 힘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어머니의 도시이다. 역시도 그는 붉은 기운을 라만차에 깊게 새겨 넣는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이 남자는 라만차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는다. 무엇으로 귀향인가? 그것은 바로 자궁으로의 귀향이다. 그의 상징이 되어버린 붉은 기운은 강렬하게 마음을 자극한다. 어머니의 뱃속 풍경처럼 뜨겁고 흥분된다.

 

 모성은 모든 것을 설명한다. 그 어떤 부사 수식 어구를 붙여도 모성은 우리의 근원이자 사랑이다. 언제나 생각하면 눈물과 함께 나오는 엄마라는 이름. 진부한 표현일지 몰라도 사람은 자궁에서 기어 나오면서부터 그녀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의지한다. 그러한 모성은 여자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알마도바르 감독은 그 절대적인 사랑을 영화에 적나라하게 펼쳐놓는다. 삶을 살아가며 이제는 잊혀 진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고민하며 우리의 엄마를 끄집어낸다. 붉은 색 속에 펼쳐진 여인들은 보다 강하게 보다 억척스럽게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 시킨다.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라 할지라도 그대들은 위대한 어머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주위에는 언제나 자신들을 핍박하고, 탐하는 남자라는 종자들이 씨를 뿌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는 어머니의 존재가 말라버린 낙엽처럼 죽음에 완전히 가려져버려 아무런 감정도 주지 못하는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조금은 페미니즘 적이라 하더라도 어머니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그 무차별적인 사랑에 가리워져 그의 영화에 남자가 비집고 들어갈 곳은 없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가 금세라도 나를 떠날 것 같은 극도의 불안감 때문에 말이다. 알모도바르가 강조하는 위대한 모성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알모도바르의 여성 지향주의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여성자체를 완전히 이해하면서 나오는 견해들을 밝히기에 그를 비난하는 자는 극도의 페미니스트 혹은 마초라 불린다. 를 통해서 여성의 죽음과 모성에 대해 깊이 탐구해오던 그는 귀향을 통해서 좀 더 깊어진 농과 좀 더 억지스럽고 기괴한 모습으로 영화를 펼쳐 놓는다. 그 모습이 절대로 밉지 않은 이유는 그가 아마도 여자를 너무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들이자 남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그의 영화는 모성이라는 하나 만으로 모든 죄를 덮어버리는 수준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라이문다는 억척스러운 여자다. 삶의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기둥서방 남편과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딸을 보살피며 삶을 살아간다. 그녀의 딸이 아버지를 죽이면서 그녀는 변해간다. 결과적으로 딸을 범하려 했던 짐승 같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사라지자 그녀는 좋은 식당을 얻어 금전적으로 숨통을 틔우고, 그 사건으로 딸과의 관계도 더욱 깊어진다. 그렇지만 그로 인한 불행이 있다면 그녀를 친자식처럼 키워주었던 이모가 돌아가신 일과 그녀를 버리다시피 했던 엄마가 그 어디에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맥거핀 효과를 통해 영화의 관심을 시체로 돌리고는 슬그머니 그의 영화에는 귀신이 출현한다. 차 트렁크에서 나온 라이문다의 어머니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맏딸 쏠레의 집에 살면서 라이문다에게 다가갈 노력을 한다. 라만차에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이가 있다면 다시 영혼으로 돌아와 그 묵은 때를 씻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이런 점을 이용해 슬그머니 등장시킨 어머니는 냉장 통 속의 남편을 넣어버린 기구한 딸을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처음 예상했던 남편을 살해한 딸을 둔 어미의 눈물겨운 모성애를 기대하던 내게는 남편을 살해함으로서 그가 가고 싶던 곳에 놓아준다는 인식으로 합리화시키는 모녀가 기이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모녀는 그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 자체가 잘 살아가기도 바쁜 사람들이다. 경찰이 수사의 압력을 조여 오는 것도 아니며 그녀의 강한 친구들은 시체유기를 돕고, 협력한다. 참으로 위대한 여성들이다. 상황은 전화위복으로 힘든 삶의 라이문다에게 금전적인 행복과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으로 세상을 뜬 이모에 대한 슬픔마저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후 남자는 없고, 오로지 딸들이 존재한다. 동생이자 딸을 가진 여자의 죄는 용서가 된다는 식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보는 내내 그 독단적인 주장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삶은 살아가기 벅찬 것이지 죄의식을 느낄 만큼 속편한 곳이 아니라는 그녀들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여자들이다. 그것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걸까? 단순히 불쌍한 여자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은 딸을 위로한 어머니가 취하는 태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분노의 감정과 그 찌꺼기는 모두 버려둔 채 원수의 딸까지 품으며 끝나는 영화의 엔딩은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이 안되는 사람들의 깊은 곳을 자극한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엄마의 마음. 그 무엇보다 큰 설득력이 있다. 조금은 유머러스하고,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붉은 색 화면 속에 기구한 그녀들은 위대하다. 왜냐면 우리는 그녀들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아직도 남성우월주의인 사회를 지탄하는 것이 아니다. 근원을 모르고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신의 근원을 생각해보라고 권유하는 감독의 뜻이 헤아려지는 부분이다. 그것이 조금은 장난스럽고 조금은 억지스럽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엄마는 엄마인데 말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유없이 사랑을 주는 그녀인데 말이다.

   변해가는 세상의 이 진부한 영화는 너무다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것은 영화는 모든 사고를 아주 단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세상의 우리는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둘도 없는 친구는 사회 속에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이제 엄마는 필요가 없다. 부실한 설정과 영화는 억지스럽고, 기괴한 등장인물에 여성들만 가득하지만, 라이문다가 부르는 한 곡소절처럼 영화는 간단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아직도 세상의 모든 이득에 눈이 먼 자식들에게 그대들의 어머니를 위한 모든 것을 생각해 보길 권유한다. 점점 멀어지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속에 우리가 돌아가야 할 종착지를 말해 준다. 모든 것을 용서서하고 이해하는 그녀의 품 속을 향해서 말이다. 잘 생각해보면 그 속에 모든 가치가 존재함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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