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일주일이 지나도 가을이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내가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발신 번호 표시는 제한이라 전화를 걸 곳이 없었다.
내가 그 날 많이 잘못했던 걸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내게는 돌아오지 않는다해도 목소리만이라도 들을 수 있는 지금은 나에게 엄청난 삶의 희망을 주고 있는 데...
이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에서야, 가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연락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듯이 여전히 발신 번호 표시는 제한되어 있었다.
"가을이니?"
"어? 어떻게 난 줄 알았지?"
"발신 번호 표시 제한은 너 밖에 안하니까."
"그런가? 어쨌든 오늘은 술 한잔 했어. 같이 살던 놈이랑도 헤어졌고, 지금은 호프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랑 같이 살아. 결국 형수랑 바람난 거 다 들켰거든."
"그렇구나... 아참,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데..."
"뭔데?"
"내가 첫휴가 나가는 날에 있었던 일에 대한 건데..."
"아... 그거? 너도 참 멍청하다. 대충 주변을 봤으면 의심을 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 날 네가 만난 내 친구랑 나랑 그 때 같이 살고 있었거든? 내가 학교도 짤리고, 동네에서 망신이라고 집에서 쫓겨났을 때, 그 친구는 혼자서 자취하고 있어서 같이 살았어. 너랑 만나야 하는 날이 됐을 때, 그 땐 정말 왜 그랬는 지 만나기 좀 그렇더라고. 정말 미안했었지, 그 때는."
어이가 없었다. 난 그 날부터 3년이라는 시간동안 감쪽같이 속고 살아온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던 걸까? 그런 거짓말을 사람을 얼마나 망쳐놓을 수 있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걸까?
"너무했어... 그 때 현실을 바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그 때부터 얼마나 힘들게 지냈는 줄 알아?"
"거기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해. 내 친구도 너랑 얘기를 좀 하고 나서 나한테 그러더라. 미안하면 만나서 잘해보던가, 아니면 급한 일로 못만나게 됐다고 하면 될 걸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냐고 말야."
"..."
"그 땐 정말 미안했지만 그렇게 나를 잊어줬으면 했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예전 같지 않아졌는 데, 갑자기 네 휴대폰 번호도 생각나고, 어떻게 사는 지 궁금도 해서 전화했던 거였어."
"그러면... 아직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네..."
"야, 지금까지 무슨 얘길 들은거야? 날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건 고마운데, 어쩜 그렇게 세상을 바보 같이 살아?"
"상관없어. 지금 네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거면 됐어."
"지금 웃음이 나와?"
"아참,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해서 돈 많이 벌면 너 데리러 갈게."
"그 때까지 나 안기다려. 그 전에 돈 많은 사람 만나면 시집 갈거야."
"조금은... 아주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주면 안될까?"
"지금 내가 이러는 거 싫으면 전화를 받지 말던가. 왜 또 질알이야?"
"아, 가을이 너 아직 기독교 믿어?"
"말 돌릴래? 기독교? 안믿어. 이젠 절에 다녀. 절에 가니까 스님이 나더러 엄마라고 그러더라."
"엄마?"
"스님 눈에는 다 보인다나봐. 내가 그런 일 했다는 것도 알고 있데? 그래서 그냥 편하게 부르라 그랬어."
"아... 그렇구나..."
"너 때문에 술 맛 다 베렸어. 이만 끊을래. 잘 지내고, 다음에 또 연락할게."
"어... 그.."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지만 다시 전화한다는 말에 묵묵히 기다렸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오랜 시간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1년이 지나서야 가을이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동안 나는 다른 여자들을 만나기 보다는 장학금 받으며 학교를 다니며, 그저 공부에만 열중했다. 학교 수업이라도 잘 듣고, 잘하면 좋은 곳에 갈 거라는 착각을 했던 것이었다.
"1년만이네..."
"그래, 잘 지냈어?"
"나야, 뭐... 네 연락 기다리면서 공부하고 있었지."
"아직도 날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아직이 아니라 앞으로 쭉이야. 그러니까 내게 더 이상 사랑한다는 말 따위 안믿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래, 알았어. 그런 말 하지 않을게."
"조금은 부드러워졌네."
"웃기지마. 착각하지 말라고. 그렇게 해봤자 너에 대한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니까."
전화를 끊고, 혹시나 해서 싸이월드에 접속해봤다. 그리고 가을이의 이름과 생년월일로 회원을 찾아봤다.
단, 한 사람. 가을이만 검색되어 나왔다. 가을이의 미니 홈피가 맞는 지 클릭해봤다. 기본정보나, 방문자들의 글을 봤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가을이의 미니 홈피가 맞았다.
가을이가 연락을 다시 해올 때까지 나는 가을이의 미니 홈피에서 가을이의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누구와 사귀다가 헤어졌는 지, 가을이의 친구들은 어떤 애들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미니 홈피를 방문하다보니 어느 덧 드는 생각이 내가 지금 스토커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의 미니 홈피에 나도 방문자로서 글을 한 번 남겨본 적이 있지만, 이내 삭제 됐다.
확인은 하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