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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알고 보면 더 재밌다! (8/10 - 보론)

김상규 |2007.07.27 19:39
조회 59 |추천 0



1. 5.18 광주민중항쟁에 미국이 개입한 증거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 한편 5월 22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또 미행정부는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2000년 4월 22일 미국에서 “20년 뒤 광주” 라는 5.18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당시 한미연합사의 미군사령관은 특전사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이 병력이 야만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군 이동은 전두환이 결정했고 최규하가 형식적으로 승인했다.”


96년 한국 관련 극비 문서 1,749건을 공개해 미국이 광주학살에 어떻게 개입했는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팀 셔록 기자는 “미국과 광주 - 20년 뒤”라는 논문에서

“미국이 광주항쟁진압 과정을 알고 있었고 87년 민중항쟁 때 전두환 정권의 군대 동원을 막은 점으로 볼 때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벗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이 아직 5.18 항쟁 관련 중요 문건 20여 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들 자료가 공개되면 미국의 개입 사실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


  아마 여기에는 신군부가 진압에 실패했을 때 직접 미군을 동원하려 했던 22일 백악관 회의 문건도 있을 것이다. 셔록(46) 기자는 9살 때 교회 일을 보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 4.19를 직접 목격하고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원 논문도 한국 경제에 대해서였다. 그는 89년 미 국무부가 한국 국회에 제출한 거짓말투성이 백서를 보고 당시 비밀전문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앞으로 80년대 한미관계를 담은 책을 쓸 생각이란다. 비밀 전문과 그들이 자랑삼아 내뱉은 말에서 그들이 광주학살에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증거가 엄청나게 있는데도 그들은 아직까지 사과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홀보루크의 말은 미국의 정확한 입장이다.

“광주학살에 미국이 한국 장성들과 적극적으로 공모했을 것이라는 의심은 솔직히 기상천외의 엉뚱한 생각이다. 

이러한 공모행위는 우리 미국이 추구해왔던 모든 정치적 가치에 벗어날 뿐 아니라 역겨운 것이다. 전두환이 특전사를 광주에 투입한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미국은 그 사태를 중지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우리는 특전사에 대한 관할권도 이동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었다. 학생데모에 군대를 사용한다는 계획에 대하여 미국은 경악했다. 미국은 이 사태의 처음부터 끝까지 뒤에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법적, 외교적, 도덕적 책임도 없다.”


그러나, 셔록 기자가 밝혀낸 비밀전문을 보면 이 말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80년 1월 19일 전문

  “12.12 이후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전환기에 안정적인 바탕을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적극적인 활동가가 되어버렸다.”


2) 80년 5월 29일 전두환이 편집국장들에게 한 말

  “미국은 12.12,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 5.17 조치 등 모두 사전에 통보 받았다.”


3) 80년 8월 27일 워컴이 AP통신과 회견에서

   “10월 사태이후 미국이 한국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 보람도 크다.”


이날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이다.

 

4) 뉴욕 타임즈

   “12.12 때 새로운 장성들이 정승화보다 오히려 온건하다.

    역쿠테타를 해서는 안된다고 정승화 직속 부하들에게 경고했다.”


5) 80년 5월 8일 전문 : 한국 정부, 특수부대를 이동시키다.

   “모든 특전사 부대가 비상 대기중이며 13공수는 5월 6일 이미 서울로 이동했고 7일 11공수도 서울지역으로 이동했다. 11공수는 서울로 이동한 마지막 부대로 이동 직전에는 강원도 사북에서 발생한 광부들의 소요사태 때문에 원주지역에서 대기상태에 있었다. 서울 외곽에 남아 있는 부대는 7공수 뿐으로 이 부대는 아마 전주와 광주 지역 대학생들의 소요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7공수는 5월 18일 새벽 1시에 전대와 조대에 자리잡았다.

 

6) 5월 7일 전문

  “주한 미군사령부는 포항의 해병 1사단이 대전과 부산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국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 이동에 대한 아무런 요청이 없지만 만일 요청이 오면 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


미국은 공수부대만이 아니라 귀신 잡는다는 해병대까지 동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죽고 10일 뒤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체로키’라는 최고위 비밀 정책팀을 만들었다. 이 전문은 대통령, 국무장관, 홀보루크, 국가안보회의 고위 정보 담당자와 글라이스틴 대사만 보도록 되어 있다.

 

7) 워싱턴 전문

17일 비상계엄확대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글라이스틴이 5월 8일 전두환과 최규하를 만나 전한다. 이에 앞서 7일 다음과 같은 전문을 워싱턴에 보낸다.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것에 대해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 답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미 비상계엄령 확대조치 10일전에 미국은 병력이동을 승인했다.


8) 광주진압 지지한 ‘백악관 정책검토위원회’ 회의록

  가. 시간과 장소 : 80년 5월 22일 백악관 상황실 오후 4시 - 5시 15분

  나. 주제 : 한국

  다. 참가자 : 머스키 국무장관(사회자), 크리스토퍼 차관, 홀보루크, 리치 한국과장(이상 국무부) / 터너 국장, 홀드리지 중국 및 동아 담당관(이상 중앙정보국) 존스 대장, 베시 대장 푸스테이 중장(이상 합참본부) /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아론(이상 백악관) / 그레그(국가안보회의) / 브라운 장관, 맥기퍼드 국제안보담당관 차관보, 플랫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이상 국방부)

  라. 주요 내용

      - 20사단 추가투입

      - 폭력사태가 광주 외곽으로 번질 양상을 보일 때 국방부 입장



9) 5월 22일 전문

  “우리는 미국이 계엄당국과 은밀히 결탁했다는 협의가 두렵고 광주지역에서 반미감정을 부추길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조처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10) 22일 오후 10시 전문

   “광주 폭도 수는 15만 명으로 증가했고 그들은 자동차 수백대와 화기 수천대를 탈취했다. 광주는 완전히 공포의 현장으로 변했다. 한국 정부는 전남지역에 20사단과 공군 그리고 특수부대를 비상 대기시키고 있다.”

 

11) 80년 5월 26일 전문

   “류병헌 합참의장이 워컴 장군에게 계엄군이 27일 자정 광주에 투입될 것이라고 통보해왔다.”


12) 80년 5월 27일 전문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13) 그리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 82년 7월 23일자 전문에 있었다.

   “광주항쟁 2주기인 82년 광주, 전남 지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극에 이르자 정치적으로 폭발성이 강한 이 곳에 잘 훈련되고 80년 당시 진압경험이 있는 11공수를 광주 비행장에 배치했다.”




2. 미국의 거짓말, 말, 말!!  사실은...



미국은 6척의 군함을 거느린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진해로 보내고 공중지휘용 공군기 공중 조기경보기 2대를 배치하면서 북한의 침략에 대비한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광주민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한국군이 진압하지 못할 때 미군을 직접 동원하려데 있었다.


 5월 23일 브라운 장관의 말

“ 한국사태와 관련하여 북한의 부대이동이 있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는 없다.”


 5월 27일 레스턴 국무성 대변인의 말

 “한국사태가 폭력단계로 악화된 뒤 북한측의 군사력 증강조짐은 없다.”


 미국은 당시 이란에서 반팔레비 투쟁이 반미투쟁으로 발전하여 대사관이 점거되는 수난을 당한 후 광주가 제2의 이란사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20사단의 특징은 하나회 소속 박준병 군대로 미국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부대였다. 정웅 31사단이 초기에 진압을 거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부대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20사단이다.


20사단은 공수부대보다 더 폭동진압훈련이 잘 된 부대다.

그러나 미국은 20사단은 보병부대이기 때문에 공수부대보다 덜 잔인하게 시민들을 다룰 것이라는 생각에 승인했다고 둘러댔다. 즉 광주시민들이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럼 20사단의 교도소에서 활약상을 들어보자.


[ 23일 살육을 즐기던 공수부대가 가고 20사단이 들어온다기에 청년들은 안도의 숨을 돌렸다.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보통사단이기 때문에 공수부대와 같은 잔혹행위는 없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공수부대를 뛰어넘는 살인기계였다.

“우리는 실전경험이 없는 공수부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휴전선에서 북한괴뢰와 직접 대치하면서 죽고 죽이는 실전 경험을 많이 치러 본 지옥의 사자들이다.”고 한 뒤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침마다 시체가 든 가마니가 나가지 않는 날이 없었고 헬기가 매일 오르내렸다. ]




글라이스틴의 말

“진압 일자를 25일에서 27일로 늦춘 것은 우리 노력이었다.”


미국은 세네월드 장군을 보내 작전일을 긴밀하게 조율했다.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시간을 벌어 주었다고 미국은 이야기하지만 진짜 이유는 진압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군을 배치하고 필리핀에 있던 항공모함을 한반도에 보내려면 2-3일이 필요했다.


23일 수빅만을 떠난 코럴시호는 25일 제주해역을 거쳐 진해에 들어온다. 미국은 시민군의 생명을 이틀 더 연장시켜 주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진압하기 위해서 일자를 늦춘 것이다.




5월 26일 뉴욕타임즈 보도

“학생지도자들이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내정간섭이며 공식통로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신군부와 미국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광주진압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한팀이었으며 항쟁에 나선 사림들을 완전히 진압, 소탕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휴전요청’에 대한 중재 역할을 할 어떤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 직속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와 공수부대의 일부는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으나 주둔지 밖으로 이동할 때는 관례적으로 미군사령관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이미 80년 5월 7일 전문에서 ‘한국정부, 특전사 부대들을 이동시키다’는 내용이 공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따질 문제가 아니다. 다만 광주학살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비밀을 숨기려 하는 미국의 눈물겨운 노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미국은 81년 2월에 전두환을 초청하여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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