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무신론자와 기독교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는 분들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묻고 싶다. 색안경을 쓰기 전에 너그럽고 열린 마음으로 한 번 읽어달라고. 그것이 내가 묻는 전부다. 적어도 내 목숨을 건 조심스러운 고백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근본적인 선교의 목적과 선교로 통해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보지도, 알지도 못 한다. 하지만 단지 이것으로 그들을 지적할 수는 없다. 나 조차도 선교에 대해 의심과 증오를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몇 번의 선교를 통해 늘 다르게 그렇지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경험한 나로서는 그 어떤 이성적인 반박과 과학적인 증거로서도 내 경험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갖고 욕할 때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비난의 화살은 기독교의 “본질”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희생이다. 나는 순전히 그의 가르침과 사랑의 실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통해 그를 믿고 순종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가르치셨고 그들과 어울리며 진정한 친구되신 분” 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제사장 (지금으로 따지면 영적 지도자들) 들의 위선됨과 거짓됨을 가장 많이 꾸지람하셨고 물질적으로 풍부한 자들에게 “너희들이 천국들어오는 것은 낙타가 바늘을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서 오셨고 사랑하셨지만 특히 어렵고 힘든자들에게 더욱더 어필하셨다.
자, 이제 현대사회를 보자.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와 개신교에 대한 많은 비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예수님을 믿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하지만 그를 따르는 과정중에 겪는 실수, 실패, 부족함등으로 인해 우리 크리스챤은 믿지 않는 자들만큼이나 모자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의 부족함” 때문이지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와는 별개이다.
유명한 기독교 시인인 캐롤 위머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는가: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함은 내가 너보다 더 낫고 우월해서가 아니라 나야 말로 정말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라 오직 주 예수님을 통해서만 살 수 있기에 하나님을 내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많은 믿지 않는 자들이 느끼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 기독교인에 대한 혐오감은 이해할 수 있다. 다 기독교인들이 부족하고 못나서 그런 것이니.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류와 기도를 통해 어제의 우리보다 성장하였고 내일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보다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정신적인, 도덕적인,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말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오지를 찾아서, 위험한 곳을 찾아서 선교와 봉사를 떠난다. 약 백 년 전 서양의 많은 선교사님들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한국에 일주일이나 걸려 배를 타고 들어와 희생을 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그리고 칼을 들어 자기를 찌르려던 한 한국인에게 성경을 건네다가 순교하셨다는 토마스 선교사님처럼…… 결국 그들의 희생을 통해 많은 믿는 자들이 생겨났고 결국 한국인의 힘으로 한국 교회들이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곧 애국심과 직결된다. 그것을 아는가? 대한민국의 위대한 33인 중 70 퍼센트가 크리스챤인것을?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5퍼센트가 채 안되었다는 것을 가만한다면 한 번 생각 해볼만한 일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 역시 “내 민족과 내 조국을 위해 일하며 주님이 주신 사명을 다한다.” 라고 고백하던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빛나갔다. 하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해외 선교를 나갔던 23명은 조금도 비난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비난 받아야 할 상대는 그 나라의 아프고 병든 자들을 도와주러 간 청년들을 납치한 테러세력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선교 회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며 “죽어도 마땅하다, 우리 세금으로 그들을 살리지 말자” 라는 비상식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개신교 비판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그들의 문화를 존중 안하며 우월의식을 갖고 선교활동을 한다는…” 이것은 적어도 내 스스로의 선교 경험에 비추었을 때 절대 사실이 아니다. 대다수의 단기선교원들의 마음가짐은 “그 땅의 영혼들과 당신의 사랑 안에서 교제하며 저희는 단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오겠습니다. 그 땅의 복음의 역사는 성령님께서 일으켜 주시옵소서” 이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진정으로 겸손한 사랑의 마음을 품고 다녀오는 것이 선교이자 봉사이다.
만약 기독교와 무관한 젊은 대학생들이 열정과 패기를 앞세워 위험한 오지로 여행을 떠났다가 이렇게 무장세력에 납치 되어서 온 나라가 위험한 곤경에 처해졌다면 과연 사람들은 “그 대학생들 알아서 오게 해라. 내가 낸 세금으로 그들 살리기 아깝다.” 라는 식으로 경솔하게 말할까? 왜 사람들의 목숨의 가치가 여행의 목적에 따라 달리 판단되어야 할까? 감히 어떻게 함부로 “죽어야 마땅하다” 아니면 “그들에게 협상금을 스스로 지불케 하라” 라는 편협한 생각이 대다수의 머릿속에 존재할까?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하지만 지나치게 순수했다면 순수했던) 선교와 봉사를 떠난 22명의 청년 머리 위에 총 구멍을 겨누고 있는 탈레반 테러리스트와, 잡혀간 이들을 비웃으며 “알아서 살아 돌아와라. 내 돈으로 걔네 살리지 말아라. 부끄러운 줄 알아라. 반성해라.” 라며 컴퓨터 뒤에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악플을 다는 많은 이들이 과연 어떻게 틀릴까?
생명이란 존귀한 가치 앞에서 어찌 자기가 낸 세금 운운하며 협상금을 제공하지 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 못 하고, 기독교인들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으며,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따뜻한 질책과 조언이 아닌 욕설과 상식 이하의 발언을 통하여 지적하면서 더욱더 갈등의 골을 깊게만 패어가고 있는 많은 네티즌들을 보며 나는 참으로 가슴 아프다.
만약 저들이 단 한번이라도 주님의 따뜻한 평안의 손길을 느껴봤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해봤다면, 하지만 험난하고 이겨내기 힘든 세상의 유혹 사이에서의 딜레마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런 적이 있다면 너무나 부족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겪는 실수와 모자람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마지막으로, 만약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서 상처를 받은 분들이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은 너무나 보잘것 없다.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런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겠는가? 만약 이런 부족한 인간을 보고 기독교를 판단하고 싶다면 잠시 보류해두어라. 당신 옆에 있는 우리를 보기 전에 우리가 보고 있는 위를 쳐다봐라. 예수님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옆을 볼 때는 당신은 늘 실망하고 상처를 받을 것이지만 우리가 믿는 그를 쳐다볼 때 당신은 평안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22 명의 무사귀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