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웅
'이러면 안되는데’
늘 이렇게 말하다가
한 생애가 끝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자주 해요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
나 자신과의 곡선의 관계
시원하고 투명하길 바라지만
살아갈수록 메마르고 복잡하고
그래서 부끄러워요
좀 더 높이 비상할 순 없는지
좀 더 넓게 트일 수는 없는지
좀 더 밝게 웃을 수는 없는지
나는 스스로 답답하여
자주 한숨 쉬고
남몰래 운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기도의 일부로
받아들여주신다면
부끄러운 중에도
조금은 위로가 될 것 같다고
‘내 탓이오,내탓이오…’
가슴을 치는 이 시간은
눈물 속에도 행복하다고
바람 속에 홀로 서서
하늘을 봅니다
부끄러운 고백 ---
법문 - 숭산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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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믿는 데도 먼저 그 목적을 바로 알고 갈길을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다들 아시는대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는 겁니까.
이렇게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는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옛날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如何是佛法)?”
“봄날 닭우는 소리이니라(春日鷄聲).”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봄날 닭우는 소리라니.
봄날에 닭이 우는 소리가 어떻게 불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봄날 닭우는 소리를 알면 인생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했잖습니까. 닭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가 그 소리를 들었나요. 내가 들었습니다. 무엇으로 들었는가요. 귀로 들었습니다.
그럼 죽은 사람의 귀도 뚫려 있는데 그 죽은 사람도 들을 수 있을까요. 없겠지요.
그럼 나는 무엇으로 봄날 닭의 울음 소리를 들었습니까.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자, 이렇게 자기의 근원을 캐 묻고 또 캐 묻는가운데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를 봄날 닭우는 소리라 해서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이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닭울음 소리에도 불법의 적적대의(的的大義)가 들어 있는 겁니다.
익히 들어 본 것이지만 선문답을 더 들어 봅시다.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삼서근이니라(麻三斤).” 또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 입니까(如何是佛)?”
“마른 똥 막대기니라(乾屎궐).”
불교를 묻는데 이런 괴상한 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어떻게 부처를 똥막대기에 비유한다는 겁니까. 모를 일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그 말을 한 놈이나 듣는 놈이 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모르느냐. 그 말한 것, 부처나 똥막대기 마삼근을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대화하는 너와 나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또 무엇이냐. 그것은 곧 부처입니다.
마조스님의 유명한 공안이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마음이 곧 부처니라(心卽是佛).”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如何是心)?”
“부처가 곧 마음이다(佛是卽心).”
마음과 부처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란 것인데 문답은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부처냐고 다시 물어 보는데 그때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합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집착이 없어서 부처에게 의지하지도 않고 마음에 매달리지도 않는 곳에서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로 하면 장난 같기도 하고 도무지 헷갈려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선 공부하는 이들에게 기본이 되는 이 화두들을 들어 설명하는 것은
불교를 쉽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묻는 말은 한결 같습니다.
“무엇이 부처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가지각색입니다.
말로 글로 이름지어진 것에 집착해서는 그 도리를 절대 알지 못합니다.
태양을 일본사람은 ‘다이요’라 부르고 미국 사람들은 ‘Sun’이라 부릅니다.
그렇다고 태양의 본질이나 그 빛이 변하는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이라 부르던 상관없이 태양은 그렇게 떴다 집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인간이라는 ‘나’를 비롯해 모든 사물의 진실,
그 본래의 모습입니다.
진실된 모습,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섣불리 이름을 붙여 버리는데서
우리의 번뇌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면
무엇을 깨달을 것인지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깨달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장서방이 장에 가니 나도 간다는 식으로 불교를 믿으면
번뇌의 그늘만 더 커지는 겁니다.
요즘의 경제위기도 우리가 우리의 본질,
우리 나라의 현실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하고 다른 나라가 가는 길이 위대하게만 보여서
무작정 그 길을 따라 가다가 만난 막다른 길인 것입니다.
옛 선사들이 끊임없이 “무엇이 불교인가”를 물었듯이
현대인들도 끊임 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대에 맞는 불교의 실체가 보일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구도심이 없는 세상은 경제, 정치, 도덕, 문화도 없습니다.
“무엇이 불교입니까?”라고 묻듯
“무엇이 정치입니까?”
“무엇이 경제입니까?”라고 물어 봅시다.
오늘의 어려움이 극복될 것입니다.
8월 1일 [오늘]
1402년 (조선 태종 2) 신문고 설치
1789년 프랑스인권선언
1819년 허먼 멜빌 태어남
1834년 영국 노예해방 선언
1894년 (조선 고종 31) 청일전쟁 일어남
1927년 崇山(숭산) 李行願(이행원), 평남 순천에서 출생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
1946년 제주도, 도로 승격
1950년 미국, 대만과 방위협정 조인
1960년 서울경제신문 창간
1961년 KBS 서울 중앙방송국, HLSA에 채녈을 신설하여 경인지구 방송 개시
1972년 윤이상 오페라 , 바이에른 음악제 첫날 첫 프로그램으로 공연
바이에른 음악제는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로서 8월1일부터 40일동안 열렸다.
1976년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 획득 -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
1976년 김해 국제공항 개항
1981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발표.
1981년 미국의 24시간 음악방송 MTV 개국
1983년 국제자동전화 개통 (24개국)
1987년 한국-몰타, 국교 수립
1988년 소련, 미국의 참관 아래 SS12 미사일 폐기 개시
1988년 가나안 농군학교 설립한 일가(一家)김용기金容基(1912∼1988)별세
1990년 정부, AFKN 채널 2 반환 UHF 34채널 신규 배정 한미간 합의 발표
1991년 경찰청 발족
1991년 (복)자비동산, 제주요양원 설립
1997년 러시아 피아니스트 리히터 사망
2000년 의약분업 본격 시행
2000년 지하철 7호선 전구간 개통
2005년 디스커버리호 승무원 우주 유영
달마의 진신론(眞身論)
"만약 제가 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면 부처를 생각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공양물을 바치고, 계율을 지키며, 불법에 헌신하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 그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왜 성취할 수 없습니까?"
그대가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며 좋은 업을 쌓은 결과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생사의 바퀴를 돌리게 한다. 그대가 생사의 바퀴 속에
매여있는 한 그대는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아야 한다.
그대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 모든 말들이 무의미한 것이다.
부처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업으로부터 자유롭다.
인연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이가 바로 부처다.
만일 그대가 부처가 어떤 것을 성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부처를 중상모략하는 것이다.
부처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집중시키고 힘을 모으고 어떤 견해를 갖는 것이 부처에게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존재가 아니다.
부처의 마음은 비어 있는 것이 그 본성이라서 순수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 모두를 초월한다.
그는 인과의 법칙에서 자유로우며 깨달음이나 수행에서도 벗어나 있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부처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부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자신이 부처라는 생각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부처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보지 않는 한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서 그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그들은 끝없는 허공에 떨어져서 마치 술에 취한 자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들은 악으로부터 선을 가려낼 줄도 모른다.
만약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를 수행하려 한다면,
그대는 먼저 자신의 본성을 봐야 한다. 먼저 그대의 논리적인 사고를 멈춰야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업이 없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생각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벗어날 희망이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됩니다.
왜 누군가 그의 몸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마음을 보지 못합니까?"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 그대는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존재한다면 왜 제가 보지 못합니까?"
그대는 꿈을 꾸어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그대가 꿈을 꿀 때 그것은 그대인가?
"예, 바로 접니다."
그러면 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그대와 어떻게 다른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르지 않다면 이 몸은 그대의 진짜 몸이 아니다.
그대의 진짜 몸, 즉 진신(眞身)은 그대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시작도 없는 영겁으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결코 죽거나 새로 생기지 않는다.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지도 않으며, 불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행이나 악행으로 깨끗해지거나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그것은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다.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 승려나 속인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니며, 성자나 바보도 아니다.
그것은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업으로부터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모양이나 형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허공과 같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물론 잃어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산이 막혀도 통과하며 강이나 바위벽도 그냥 지나간다.
그것의 멈출 수 없는 힘은 오대(五大)의 산을 넘어가고 삼사라(Samsara)의 강을 건너간다.
어떤 업도 이 마음을 제한할 수 없다. 이 마음이 진신(眞身)이며 바로 그대의 본성이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마음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빛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은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 마음이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들이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
오대의 산 - 불교에서 말하는 다섯가지 기본요소[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삼사라의 강 - 윤회의 강을 가르키는 이름
양귀비-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