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명동성당 앞 은행나무 두 그루

최원석 |2007.08.08 19:32
조회 289 |추천 0

오래간만에 오창훈 선생님의 최근 글을 올려드립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많은 분들께서 아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글의 출처 : 김철민 선생의 국어교실 http://cafe.daum.net/chulmin016 - 오창훈 한국사 사랑방  "살아가는 이야기" 게시판)

 

~~~~~~~~~~~~~~~~~~~~~~~~~~~~~~~~~~~~~~~~~~~~~~~~~~~~~~~~~~

오창훈 선생님은 현재 종로박문각행정고시학원과 강남박문각행정고시학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고시학원 강사라고 하면 돈밖에 모르는 장사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수강생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주시려고 노력하시는 몇 안되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몇 안되는 분들 중 한분입니다.

~~~~~~~~~~~~~~~~~~~~~~~~~~~~~~~~~~~~~~~~~~~~~~~~~~~~~~~~~~

 

 오랜만에, 정말 오랜 만에 일이 있어 명동에 나갔다. 우리네 젊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붐비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더라. 약속시간에 남기에 산보 삼아 중앙극장(중앙시네마) 골목길을 따라 명동성당으로 향하였다. 바로 옆에 위치한 YWCA 회관 건물을 보니 새삼스레 우영 이회영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1

국가나 사회가 극한 상황에 이르면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인간상이 보이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의 몰락과 일제 지배라는 전환기를 맞아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 전환기가 출세하거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호기라고 판단한 친일파 등 기회주의자도 있겠고, 일제의 탄압을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그저 숨죽이고 살았던 대부분의 민중들도 있겠고, 이전까지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투쟁에 나서는 독립운동가도 있고 말이다. 

일제지배기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과대 포장된 이들도 있지만, 실제 활동에 비해 과소 평가된 이도 적지 않다. 아마 그대표적인 집안이 독립투사의 전형인 안중근(安重根) 가문, ‘3균사회’를 꿈꾼 조소앙(趙素昻) 가문과 더불어 명문가의 삶을 접고 이국 땅에서 5형제가 순국한 이회영(李會榮) 가문일 것이다. 


2

YWCA 회관과 도로, 마리아 상이 있는 명동 성당 일부가 우영 이회영이 살던 곳이었다. 명동성당 정면의 오른쪽에 서 있는 수령 150년 가량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이회영 네 6형제의 아버지인 이유승의 심어 놓은 나무라고 하고..... 우영 이회영 집안은 조선 멸망 당시 조선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엄청난 부자이었다. 일확천금으로 재산만 부풀린 졸부가 아니라 몇 대에 걸쳐 재상, 판서를 지낸 경주 이씨 가문이기도 하였다. 백사 이항복의 12대손이기도 한 이회영 집안은 아들만 여섯 이었는데, 모두 40명에 가까운 정승, 판서, 참판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명망가 집안인 이들 6형제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1910년 12월 혹한 속에서 만주 벌판으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6형제에 딸린 가솔들을 전부 합하면 60명의 대가족이 집단 망명을 한 것이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씨 형제들은 노비들에게도 반발을 하지 않고 ‘하소’를 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망명하기 전에 노비들이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신분해방을 해 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명 가운데에는 데리고 있던  몇 명의 노비들은 행동을 같이 하였고 말이다.

나라가 통째로 망했는데 조상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면서 서울 명동에 위치한 집뿐 아니라 위토(位土)까지 평소에 친분이 있던 최남선에게 헐값으로 팔고 서간도의 삼원보로 이주하였다. 경기도 구리에서 시작하여 덕소, 마석까지 이어지는 46번 국도 주변에 펼쳐진 땅이 모두 이회영 네 집안의 소유이었는데 이들을 팔아 마련한 현금이 거금 40만원이었다. 이를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600억 원 정도에 이른다고 학자들은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1989년 토지 감정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고, 물가가 크게 오른 2007년 오늘날을 시가로 따진다면 아마도 그 금액의 10배, 20배는 더 부풀려져야 하겠지. 


3

600억 원, 아니 6,000억 원 이상 되는 자금을 가지고 만주에서 한 일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무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관 양성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20년 폐교될 때까지 10년 동안 약 3,000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만주 일대에서 이 학교에 몰려든 학생들의 수업료와 생활비는 일체 무료였다.

여기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 핵심 병력으로 참가하였다. 월등한 화력을 갖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운 정신 무장과 훈련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겠지. 훗날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40년에 무장 조직인 광복군을 창설하였는데,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그 주축이 되었고 말이다.


이회영을 포함한 이들 6형제는 만주는 물론이고, 베이징, 텐진, 상하이를 일대를 오고 가면서 수많은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고국에서 가져 온 자금도 바닥나자 그들은 이역만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27년 환갑이 넘은 나이로 텐진의 빈민가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던 이회영을 만난 한 친지는 이렇게 술회했다고 한다. “남개에 사는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 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로 누워 있었다. 학교를 다니던 규숙이의 옷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다니지도 못했다.”

조선 제일의 명문가 후손이 딸의 옷까지 팔아야 했다는 것이다. 6형제 가운데 시영만 제외하고 5형제는 모두 중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행려병자처럼 쓸쓸하게 죽어 갔고 말이다.


4

한국 근, 현대사를 강의하다 보니 때로는 수난과 질곡으로 점철된 이 땅에서 큰 무리 없이 살아간다는 건, 역설적으로 부끄러운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구한말, 일제 지배기, 6․25동란, 독재체제를 거치면서 이에 앞장서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눈 감고 방조해 왔던 건 사실이 아니던가? 그러하기에 부모, 또는 우리들이 살아온 삶 자체가 풍성한 이야기 거리이기에 훌륭한 대하소설이나 영화 작품 등이 나올 수도 있겠고 말이야.

누군가는 그러더구먼, 새삼스레 ‘독립운동가’이며, ‘소외된 이웃‘을 언급하니 술맛이 달아난다고도 말이다. 그래도 이 나라가 이 모양이라도 살 수 있었던 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고, 행여나 지금의 우리의 행복(?), 내지는 안일함에 취해 누군가의 아픔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쯤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방학이라고 영풍문고에 들른 어떤 젊은 엄마는 노숙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상하게 아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큰 평수 아파트에서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못 살게 되는 거란다’  글쎄, 세상살이가 그리도 단순한 것 일런지....어릴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개미와 배짱이의 논리에 조건 없이 동의하기 힘든 건 왜 그럴까?

‘참으로‘ 무엇이 잘 사는 길인지, 우리 어른들도 모른 채 그냥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우리네 아이들에게도 강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특목고, 명문대를 들어가면 자식 교육 다 되는 듯이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으로, 과외로 내몰려지고 있다. 초조해하는 부모들의 조바심과 대리 만족을 부추여 공룡처럼 거대해진 교육시장을 씁쓸하게 지켜보고 있다.

큰 흔들림 없이 살아왔기에 우쭐하는 기분에 때로는 자기 착각에 빠지는 아들 녀석이 있다. 우연을 빙자하여 이 녀석과 함께 명동 나들이를 하면서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확인해보는 기회를 마련해 봐야겠다. 


*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배화여고 뒤편 암벽에는 이항복의 또다른 호를 따서 직접 쓴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가 있다. 그 옆에는 백사 이항복의 생가 일부가 있었는데 바로 이 자리에 이회영 6형제의 업적과 각종 자료를 전시한 우당 기념관을 세워졌다. 중,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거든 한 번쯤 같이 들러 봐도 좋은 듯한데, 이에 앞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 닷컴, 2004)’을 먼저 필독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