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책이 있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고, 소문난 사람이 알고보면 허명이 많듯, 책도 언론 혹은 출판업계가 만들어낸 베스트셀러 대부분도 막상 펼쳐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허나 사람이 그러하듯 퍽 흔치는 않지만, 처음 접한 순간 받는 그 느낌 그대로 기대를 배신 않고 생의 한순간을 의미있게 해주는 보석같은 책이 있다.
바로 그런 책 중 하나가 이 책이다.
부제 처럼 이 책은 평양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탈북 망명하여 한국에서 살다가 현재 예일대에서 강의중인 한 지식인의 삶의 기록이다.
책 소개나 표지에 실린 저자의 사진만 봐도 어떤 에너지장, 기운같은 것, 그 사람이 평생 쌓아온 氣 내지 내공같은 것이 느껴지며 설레이게 하는 책이 있고, 이 김현식 교수의 '21세기 이념의 유목민'도 그런 설레임을 느끼게 해준 책이다. 근래 보기 드물게...
저자인 김현식 교수는 이북출신으로 한국전쟁때 북한군에 징집되어 총탄 파편을 맞고 왼쪽 뇌와 팔에 평생 그 상흔을 지닌채 살아온 전쟁 피해자이다. 가족도 전쟁통에 거의 죽고, 남한으로 가게 된 누님 한분이 계셨으나 북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님의 존재조차 밝히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한국전 종료후 북한의 11년 무상교육의 혜택으로 - 저자는 북의 심각한 인권유린과 독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이같은 북의 무상교육제도등이나 초기 사회주의 모델 건설당시의 일정한 장점들에 대해서는 명백한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 - 대학을 마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곧바로 대학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평양사범대 노어과 교수로 재직하며 북한 로열패밀리 (김일성 직계 가족, 그러나 김정일 집권후 곁가지로 숙청당한 김일성의 둘째 부인 김성애의 자녀들인 김평일등)의 가정교사로 지내기도 한다.
러시아에서 교환교수로 재직하던중 수십년간 소식이 끊겼던 누님(미국 거주)과 연락이 닿아 한국 안기부의 주선으로 은밀히 누님과 만났다가 이것이 북한 보위부의 귀에 들어가 한순간 숙청당해 죽음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처지가 되자 우여곡절끝에 모스크바를 탈출, 서울로 오게 된다.
평양에서 그래도 고위층 신분으로 50년 가까이 살아오다가 한순간 서울의 탈북자가 되어 대신 수용소로 끌려간 가족들과 제자들을 등진 자책감과 자유는 있으되 또다른 부조리가 판치는 남한의 현실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고민등으로 괴로와하던 저자는 뛰어난 노어실력과 연구열로 한국 외대 노어과 교수로, 또 북한대학원 및 국방대학원 교수로 북한 현실과 노어를 가르치며 남북표준말 사전 제작등 강의와 저술에 힘쓰며 살아간다.
그 와중에 어린 시절 모친의 영향으로 가졌던 기독교 신앙을 되살리고 북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기독교 특유의 선교 열정으로 북에 전할 쉬운 성경 이야기 등을 저술했다. 북한 출신 교수가 쓴 성경이야기가 미국에서 화제가 되자 예일대에서 1년간 그에 대한 조사작업을 벌인뒤 초빙교수로 불러들였다. 예일대의 초빙은 통일교육원 강연자 명단 말석에서 '탈북자 김현식' 이란 이름으로 올라가던 그를 단번에 강연자 명단 맨윗자리를 차지하게 했다고 한다. 철천지 원쑤들이 산다던 '원쑤의 땅(북에서 원수는 수령 김일성, 우리말 원수는 원쑤로 표현한다 한다)' 미국에서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으며 3년간 북한학을 강의했다.
이 책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상태에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통해 어느정도 건강을 회복한 그가 예일대 생활 틈틈히 정리한 책으로 김현식은 남한생활을 하며 새로 지은 이름이다.
저자는 단순한 탈북자로서 개인적 소회뿐 아니라 남북 교육제도의 장단점, 북한 입시 및 교육의 현실, 남한 교육의 상당한 부조리나 교수들의 무사안일한 강의 태도와 부실한 준비등에 대해서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무상교육만큼은 아무리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라도 따라가기 어려운 장점을 지녔다고 한다. 남한에서 강의를 하면서 능력있는 학생이 돈이 없어 등록금을 못내서 학업을 그만두는 것을 보고 자본이 전제된 교육의 부조리에 절망한 이유이다.
물론 북의 무상교육은 현재 그 장점보다는 무급 노력동원현장 및 끝없는 김정일 찬양 세뇌교육현장으로 전락하고 있지만 말이다. 좀 더 자본주의에서도 공교육이 사민주의 수준으로 질높은 무상교육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도록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깊히 공감했다.
아무튼 저자의 남다른 이력을 통해, 서문에서 밝혔듯 이 책은 또한 자신의 탈북으로 인해 - 북으로 송환되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 모조리 반혁명 수령배신자의 직계 가족으로 몰려 쓰러져간 그의 아내와 아들, 며느리 두 딸과 다섯 손주의 영전에 바치는 책이기도 하며, 이 책을 구술하는 내내 너무 눈물을 많이 흘려 타이핑하는 사람까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그리고 남북체제 모두의 부조리와 인간의 기본인 직계 가족의 안녕마저 보장하고 책임질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절망과 슬픔을 생생히 그려낸 책 구절구절에서 느끼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 절망과 개인적 비애의 와중에서도 또다른 사명감을 갖고 남북 언어의 이질화 극복과 평생 가르치는 일을 사명으로 살아온 이답게 무엇인가 후학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불편한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의 노력과 자세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은 북한 최고위층으로 탈북망명한 주체사상의 창시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비정상적인 남북 권력 모두에게서 절망한 탈북자들의 삶을 보노라면 정말 답답하다. 자유와 인권을 찾아 탈북한 이들이지만, 남한 역시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보다는 히틀러에 필적할 독재자 김정일과 그 하수인들의 입지만을 살려주는 대북정책을 펴고 있으니 어찌 갑갑하고 절망스럽지 않으랴 싶다.
하루속히 북한이 극심한 우상숭배와 무자비한 숙청, 수십만 정치범수용소의 현실과 인권탄압이 자행되는 비정상국가에서 정상국가로 체제전환이 이루어지고 한반도에 올바른 민족적 민주적 정통성과 보편적 인권과 상식에 입각한 통일 정부가 들어서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