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가끔은 유선방송에서 해주는 예전 영화, 그 중에서도 크게 흥행하지 못한 영화 중에 꽤 훌륭한 작품을 발견하곤 한다. 몇 달 전 쯤 우연히 보게 된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러했다. 98년에 개봉했다는 이 영화에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했던 그 유명한 마법사 간달프가 악인으로 등장하고 그 밖에 외국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낯익은 몇몇 배우가 출연하지만 헐리우드의 간판급 스타는 없다. 이미 영화를 본 분들도 있을 테니 줄거리를 설명하는 일은 피하고 싶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는 내용을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미국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호기심 많고 학업성적도 우수한데다(특히 역사) 얼굴도 잘생긴 소년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이웃으로 지내던 노인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그 노인이 과거 독일 나치정부에서 유태인이나 미국인들을 집단 학살한 범죄인이라는 것이었다. 즉, 그 노인은 등장 밑이 어둡다는 이치를 생각해서인지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미국으로 와서 미국인 행세를 하며 살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던 소년은 노인에게 찾아가 과거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노인에게 나치정부 시절의 일들을 알려달라고 조른다. 노인은 처음에는 거부하고 귀찮아하지만 점점 자기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일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기 시작한다. 바로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가 조우하는 순간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라고 하면 성도착증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이 두 가지 성향은 일반사람들 안에 내재해 있는 정상적인 경향이다. 다만 어떤 강한 에너지, 예를 들어 카리스마와 같은 힘을 만나게 되면 이러한 성향이 증폭되게 되는데 정신분석학자였던 라캉은 히틀러에게 복종하던 독일 국민을 예로 들고 있다.
영화 내에서는 마치 위의 라캉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동시에 클라이맥스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이 되는 충격적 상황을 담고 있다.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소년은 어디서 구했는지 독일장교가 입던 옷과 머리에 쓰던 모자를 노인에게 가져간다. 노인은 처음엔 어이없다는 듯 웃기도 하고 약간 화도 내며 거부하지만 결국 소년의 순간적인 강한 눈빛에 눌려 복장을 착용하게 된다.
이 때부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데 소년은 그저 독일 군인의 모습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노인에게 군대식 걸음을 해보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저 느릿느릿 걷던 노인에게 소년은 마치 군대의 상관이 된 것처럼 강한 톤으로 명령을 하게 되고 노인은 점차 그 명령에 복종하며 정확한 걸음과 손동작을 하게 되고 눈빛이 매서워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약간의 공포감을 느낀 소년이 그만 하라고 외치는데도 노인은 한동안 그 동작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소년이 돌아간 후에도 노인은 밤에 몰래 자신의 복장을 입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던 중 창 밖을 내다보다 어느 노숙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때부터 과거의 폭력성을 스스로 불러일으켜 노숙자를 살해하고 만다.
한편 소년은 학업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그는 교사에게 불려가게 되는데 소년은 부모님을 데려오라는 교사의 말을 듣고 독일 군 장교였던 옆집 노인을 대신 데려가게 된다. 부모에게 성적에 대한 문제가 직접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교사는 소년의 성적을 고려해 그에게 비공개 시험을 치르도록 제한했던 것이다.(이 부분 과정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사실과 약간 다를 수 있음) 이것은 학교 측에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소년은 노인과 맺었던 비밀 약속을 다시 교사와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비밀을 만드는 식으로 반복한다.
한편 미국 FBI(CIA던가?)에서는 노인을 뒤를 쫓게 되고 소년은 그 와중에 노인이 살해한 노숙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범이 되고 만다. 소년이 노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역전되어 노인이 오히려 소년을 협박하게 된다. 바로 자신이 나치였던 것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이용했던 것이다.
노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병원으로 옮겨진 후 FBI에게 붙잡히게 된다. 내 기억으론 아마 노인이 자살을 선택했던 것 같다. 정보국 입장에서는 살려서 형을 집행하려고 했다가 실패했던 것 같다.(자세한 것은 직접 보시길.) 그러나 정작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라 할 장면은 아직 남아 있었다. 소년과 비밀 관계를 맺었던 교사가 문제였다.
교사는 tv에서 소년이 할아버지라며 데려온 사람이 실은 독일 나치 장교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년은 자신과 그 할아버지의 관계가 알려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던 차에 교사가 집으로 찾아와 소년에게 항의를 한다. 교사가 버럭 화를 내고 돌아서려던 찰라, 소년은 갑자기 야릇하게 웃으며 교사에게 말한다. 재시험을 치르도록 도와준 것을 학교에 말하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이 상황이 정확한지 기억이 가물.)
아무튼 이 영화는 인간에게 내재한 악마적 본성이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과정을 소름끼치게 보여주고 있다. 배우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 역시 꽤 설득력 있으면서도 자연스럽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이 유주얼서스펙트를 만들었던 감독이라나, 유주얼서스펙트에 비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의 내공만큼은 그에 못지 않는 영화,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도 추천할만한 영화다.